이용악

시인 이용악 연구 - 방정민

공산(功山) 2015. 12. 31. 13:09

시인 이용악  연구

                                                             지도교수: 조동구(교수님)

                                                             발표자: 방정민



Ⅰ.생애 및 전기적 사실


1.가난의 동경 유학기


이용악은 1914년 11월 23일 함경북도 경성읍에서 출생하였다.1) 이 지역은 고려나 조선시대에 거란족, 여진족 등과 우리미족이 세력을 다툼을 하던 일종의 변두리 지역이다. 특히 그곳은 조선시대(세종에서 성종대)에는 몇 차례에 걸쳐 국경을 개척하면서 남쪽 사람들을 이민시킨 변방이기도 하다. 이 때 함경도로 이주시킨 사람들은 그 대개가 경상도나 전라도 쪽의 백성들로 별도의 생활보장 대책도 없이 국경지방에 옮겨진 것이었다. 결국 이용악은 오래 전부터 유이민이 궁핍 감정이 몸에 배인 지역에서 자란 셈이다.2) 경성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고등 보통학교를 다닌 다음 일본의 동경소재 상지대학 신문과에 수학하던 중 [신인문학] 35년 3월호에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오게 된 시골의 문학청년이었다. 이용악의 집안은 누대에 걸쳐 상업에 종사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면서 그 주된 생활근거지로 그가 태어난 고향(함북 경성)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줄곧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금을 얻기 위해 일찍부터 몸소 소달구지에 소금을 싣고 러시아 영토를 넘나들었으며 그의 어머니 아버지 또한 같은 생활을 이어받았던 듯하다.

계속되어 온 유랑생활에서 급기야는 용악의 아버지가 낯선 땅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이 정확히 언제 발생했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으나, 다섯 남매와 홀어머니가 낯선 땅, 낯선 나라에 남은 셈이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의 어머니는 국수장사, 떡장사, 계란장사 등으로 어렵게 생계를 꾸려야 했지만 그 와중에서도 삼형제만은 모두 고급학교에 진학시키는 억척스런 생활인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넉넉지 못한 집안에서 자라난 용악은 일본으로 건너가 상지대학에 유학하면서 부두선박 노동을 빼놓고는 온갖 품팔이 노동꾼으로 피땀을 흘려 최하층 생활 권내를 유전하면서 학비를 조달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고단한 고학생활을 하면서도 용악의 문학에 대한 정열은 치열하게 불타올랐다. 유학한 다음해(1935년) 패기만만한 동향의 신진시인 김종한을 만나 둘이서 [2인]을 내게 되면서 그의 문학에 획기적인 진경을 보이게 된다.3) 이 기간 중에 방학때면 으레 귀향하여 우리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간도 등지를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만주 유이민들의 비극적인 삶의 전모에 깊이 주목하고, 유학시절에 잇따라 발간한 시집 『분수령』과 『낡은 집』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2. 번민의 일제 말기


일제는 1938년 대동아 공영권을 발표하고, 병참기지화정책과 민족말살정책을 강행했다. 이해 일제는 ‘조선사상보국연맹’을 발족시키기도 했는데 이 단체가 노리는 것은 사상운동을 한 경력의 소유자 곧 항일저항, 민족해방의 경력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감시, 규제하려는 것이었다. 동경에서 고학을 하면서 문학활동에 정열을 쏟던 용악은 이 시기 단순한 문학청년으로서만 처신하지 않고 ‘조선민족을 해방시키려는 혁명운동에도 참가하여 여덟 번이나 일제의 악독한 경찰에 붙들리고 그 무서운 고문’에 시달리기도 하였다.4) 이러한 지경에 이르자 용악은 그의 시와 행동을 다소간이라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실질적으로 『분수령』이나 『낡은 집』에서 강한 줄기가 된 빈궁 의식이 삼엄한 전시체제 속에서 허용될 리 없음을 깨닫고 몇몇 작품 속에서 두드러지게 정서의 함량을 높였다. 그러나 그 바닥에는 얼마간의 시대감각을 곁들이는 일도 잊지 않았다. 이용악은 체험이나 현실에 충실한 시를 쓰는 시인이었기에 민족해방에 대한 현실적 전망이 마련되지 않을 때 절망의 시를 쓰거나 붓을 꺾는 시인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이용악의 시에는 식민지 지식인의 암울한 세계인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길」,「눈 나리는 거리에서」,「뒷길로 가자」 등의 시는 시대적 상황에 짓눌린 서정적 자아의 자조적 웃음이요, 도피요 무력한 지식인의 패배주의라고 할 수도 있다.5)


3. 혼란의 해방기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한 때 인문평론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이 잡지마저 폐간(1914.4)당한 이후에는 「춘추」, 「국민일보」등의 친일적 성향이 짙은 잡지에 이따금 작품을 발표하는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미 전시체제로 돌입한 일제에 의해 조선인 전체의 삶이 무참하게 유린되고 훼손되기 일쑤였으며 그 즈음에 용악은 마침내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귀향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해방이 되자 서울로 상경하여 활동을 재기한다. 서울로 상경한지 얼마 후 그는 ‘조선총독부 도서관(현 국립중앙도서관 전신)’의 일본인 도서관장의 관저인 적산가옥을 접수하였다. 좌우익 사이의 이념적 대립이 발전적으로 해소되지 못하고, 오히려 극도의 혼란상태에 있었던 정부수립을 전후한 시기에 그는 정지용, 정인택, 허준 등과 정릉에서 이웃해 살았으며, 주요 활동반경을 문학가 동맹의 테두리 내에 두면서 남노당에 입당하고 1948년 9월부터 농림신문 기자로 일하면서 ‘문맹’의 지령에 따라 활동하다 1950년 2월 6일 남도당 ‘서울시 문화예술사건’으로 군정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다른 시인들이 소박하게 해방의 감격을 외치거나 정치적으로 추상적인 의미들을 나열할 때 용악을 현실속의 구체적인 사람들을 문제삼고, 그들의 삶에 ‘어떠한 새로운 가능성이 놓이게 되는가’라는 것을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과정’속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용악이 다른 리얼리스트에 비하여 탁월한 점은 이것을 단지 자신 경험주의의 한계에 그치지 않고 당시의 보편적인 경험과 삶으로 확장시킨다는 데에 있다. 그가 해방 이전의 현실로부터, 그 이후의 현실로 이행하는 과정을 그려나가면서 특수한 경험들을 시에서 확장시킨 것은 시에서 리얼리즘을 성취할 수 있게 한 이유가 된다.

1950년 2월 6일에 체포되어 서울 지법에서 징역 10년을 받은 그는 복역 중에 6.25가 나자 6.28 서울 함락 때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나왔다. 박태원, 현덕, 설정식 등과 함께 월북한 그는 1953년 8월 임화, 이승엽, 이원조 등 ‘남노당계’ 수청 당시 ‘공산주의를 말로만 신봉하고 월북한 문화인’으로 지목돼 반년이상 집필을 금지당하기도 했다.6) 이를 보면 소부르주아적, 자유주의적, 지방주의적 잔재를 온존한 종파주의자로 지목돼 김일성에 의해 제거된 그들 남노당계에 연루되긴 했지만 이용악은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은 셈이다. 그 후 강제 부역을 하듯이 약간의 문학 활동을 기계적으로 양산하다가 1956년 당명에 따라 『평남관개시초』를 창작했으며, 63년에 김상훈과 함께 『역대악부시가』를 공역. 출간했으며, 66년 8월에는 「당중앙을 사수하라」를, 67년에는 「땅의 노래」, 「오직 수령의 누리에 뭉쳐」, 「찬성의 이 한표, 충성의 표시」를 당성과 이념에 의해서 쓰고 발표하였다. 그 후 71년 결핵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Ⅱ. 연구사 개관


1980년대에 들어와서 이용악의 시에 맨 처음 정당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정한숙의 문학사이다.7) 그에 의하면 이용악의 시는 “이미지보다는 묘사에 의지하며 정한의 또 다른 깊이를 보여준다. 소월로 대표되는 20년대 리리시즘과 연결되어 있다. 민족적 토착적 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서민의 애환을 표현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후 이용악 시에 대한 선행연구는 크게 두 분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시인론, 작품론 등의 이용악의 전반적인 문제를 다룬 연구.

2) 이용악 시의 사조적인 측면에 주목한 연구. 즉 그의 시가 모더니즘 경향이냐, 아니면 리얼리즘 계열이냐를 밝히려고 시도한 연구.

1)에 속하는 논자들로는 장영수8), 윤영천9), 김용직10), 감태준11), 한성우12), 이정애13), 황인교14), 여지희15) 등이 있다. 장영수는 분단문제와 결부되어 월북 문인들에 관한 연구가 어렵던  해금조치 이전에 「오장환과 이용악의 비교연구」라는 학위논문을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다. 물론 연구대상은 이용악의 두 번째 시집 『낡은 집』에 국한 된 것이었지만, 용악의 시가 “현대시에서는 드물게 간도 지방, 북부 지방을 배경으로 한 침통한 분위기를 담고 있고, 이에 상응하는 무겁고 느린 호흡의 시어”를 형성하고 있음을 지적하여 이후에 그의 시를 해명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어서 윤영천은 유이민 문제의 시적 반영으로서 이용악의 시를 다루고 있는데, 일종의 민족 문학적 시각에 의한 것이다. 특히 그는 1988년에 『이용악 시 전집』을 내놓아 우리들이 쉽게 그의 시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김용직은 이용악의 시가 빈궁의 감정이 고조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프로의식이 표출이라는 자연 발생적인 측면을 주목하였으며, 그 후에 감태준은 「이용악 시 연구」를 통해 이용악 시의 정신사적인 의미규정, 시의 구조원리와 방법적 특성을 규명하였는데, 실제로는 시인론, 작품론이 총망라되어 있어 이용악 시의 전체적인 특성을 파악하는데 기여하였다. 한성우는 이용악의 시세계를 전반적으로 분석하고 이용악시의 특질을 구명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정해는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았던 많은 자료를 찾아내어 이용악 연구를 더욱 용이하게 해준 서지적 작업을 높이 살 만하며, 황인교는 이용악의 대표 시집인 『낡은 집』을 대상으로 그의 시를 기호학적으로 분석하였는데, 문학의 실천적 기능이 요구되는 시대에 보편적 양상으로 나타나는 서정적 언술의 서사적 실현의 방법을 밝혔다는 데 의의가 있다. 여지희는 프로이트 심리학으로 언어를 통해서 재해석함으로써 이용악 시의 정신사적 혼란과 변모과정을 고찰한 것이 특이할 만하다.

2)의 항목의 연구로는 최재서16), 백철17), 조지훈18), 김윤식19), 조동일20) 등의 연구를 들 수 있으며, 최근에 발표된 많은 논문21)들의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

모더니즘에 대한 시적 지향으로 인해 이용악 시가 관념시로 전락하는 것을 일찍부터 경계한 최재서는 이용악의 시를 “침울한 패배적인 半面에 있어서만 우수하고, 일보 쾌활한 혹은 명랑한 건설과 미의 세계로 들어가면 약점을 폭로함은 수긍은 되면서도 적이 섭섭한 일”이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1930년대 한국의 시사에 폭넓은 영향을 끼친 바 있는 모더니즘적 경향에 주목했던 백철은 모더니즘의 후예들 속에 이용악을 넣으면서 ‘일종의 경향시인’이라고도 덧붙이고 있다. 즉 이용악을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는 뜻을 피력하였다. 조지훈은 약간 표현을 달리하여 ‘현대파와 인생파의 중간’이라고 적고 있으며, 김윤식은 이용악을 ‘회화적 경향과 윤리적 경향의 절충적 입장’이라고 하였다. 한편 조동일은 “다정한 느낌을 주는 시인이면서 언어 감각이 날카롭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준엄한 자세를 나타냈으며 역사 앞에서 처절하게 절규하는 지점까지 나아갔다”고 하였다. 최근에 이용악 시를 심도있게 연구한 윤영천도 이점에 있어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용악 시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양면성(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 상호보완적 필요를 제공하는 두 가지 상이한 측면의 분열적 공존인가”22)를 밝혀내는 일이라 하여 이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듯 이용악 시의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에 관한 평가는 논자마다 여러 가지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나 이를 정리해 보면, 그의 시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절충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러나 그의 시의 우수성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요소의 어정쩡한 절충에서 오는 것은 아니고, 리얼리즘의 현저한 우위에서 비롯된다는 견해가 지금까지 지배적인 것으로 되어있다. 즉 그의 시는 삶의 존재론적 의미를 천착하는 데 치중하는 존재의 시가 아니라 인간상호간의 갈등적 삶을 선명하게 개괄해 내는 투철한 현실인식을 강조하는 ‘생활의 거짓없는 기록’이라는 것이다.23)

여기서 2)를 좀더 세분하여 살펴보면 리얼리즘에 중심을 두고 접근한 논의들은 민족현실에 대한 탐구와 그에 대응하는 지식인 시인의 정신을 해명하는 데 주력하였으며,24) 모더니즘의 긍정성에 주목한 논의들은 언어적인 측면과 관련하여 형식과 기법의 특징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25) 또한 두 가지 평가를 모두 수용하여 이용악 시의 특징을 포착하려는 절충주의적 논의도 있었다.26)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 기초한 논의들은 이용악 시를 본격적으로 평가하였으며, 이후 다양한 논의에 바탕을 제공하였다. 리얼리즘의 측면을 강조하면서 이용악의 모더니즘을 비판했던 논의들은 이용악의 모더니즘적 성향이 지닌 긍정성과 부정성을 동시에 논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27) 모더니즘에 기반을 둔 연구자들도 리얼리즘 연구를 “주체적 접근 일변도로 공동화시키려는 시도”28)라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개방성을 규명하려는 해석으로 발전하였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특정한 관점에 따르는 연구에 대한 반성은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되었다.29)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은 창작방법의 한 원리로 기능할 수 있을지 모르나 해석방법의 원리로 한 편의 시를 온전하게 해석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어떤 시는 리얼리즘이며 어떤 시는 모더니즘이라는 식의, 또는 하나의 시 안에서 리얼리즘적 요소와 모더니즘적 요서를 따로 색출하는 식의 연구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시 속에서 상호보완적인 요소로 작용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Ⅲ. 시작 경향 및 변모 양상


1. 초기 모더니즘 경향의 시


1935년 카프가 해체되자 문단 일각에서는 새로운 문학운동이 잉태되고 있었다. 카프의 해체는 카프의 비판적 표적이 되었던 순수문학의 문학적 입지를 확장시켜 주었다. 이런 이유로 소설쪽에서는 역사소설과 세태소설이 등장하고 시의 경우에는 주지주의, 초현실주의, 이미지즘, 다다이즘 등 모더니즘 경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어 순수문학이 한국문단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는 동기가 되었다.

1933년경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모더니즘 문학은 시에서 정지용, 김기림, 이상 등이 활동한 구인회와 박용철, 김영랑이 주축을 이루었던 시문학파를 주목할 만하다. 이용악의 시작 활동은 이 즈음이었다. 동경 유학 시절 1935년 3월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며 등단하게 된 이용악은 카프와 모더니즘, 그리고 시문학파의 영향을 고루 받았으나 그 중에서도 그가 문단에 나온 직후에는 모더니즘 경향의 시를 많이 썼다. 이용악에게서 보이는 모더니즘 경향은 20세기 자본주의하에서 시장경제 체제의 중심부에서 소외된 특정 계층에 의해 생산되고 강화된 예술적 태도로서의 일반적인 모더니즘과는 일정하게 구분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본질적으로 모더니즘은 ‘역사창조에서 신념을 잃은 기득권자들의 정신적 고뇌를 표현한 것 이상이 못 되는 독단적 문학주의’로 규정30)할 수 있겠는데, 그것이 보여주는 지적 엘리트주위 또는 사회와 단절된 고립주의 등과 관련시킬 때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시 일반이 이런 평가를 모면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역사 발전에 대한 낙관적 전망의 결여, 암담한 시대 현실에 말미암은 사회적 절망감과 위기의식 등이 복합된 예술적 결과물로서의 모더니즘 시가 갖는 사회적 및 미학적 제한성은 그 발생의 처음부터 스스로 예비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럴게 볼 때 용악 시의 모더니즘 지향성은 선뜻 이해되기 어려운 점을 갖는다. 먼저 이상한 것은 그의 계층적 입지와 그러한 지향에서 드러나는 근본적 상반성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양자가 문학적으로 합쳐졌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초기작품은 모더니즘에 대한 확고한 세계관적 기초 아래 이뤄졌다기보다는 당시의 문단적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한 결과가 아닌가 짐작한다.

용악의 모더니즘적 취향은 일과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후로도 간간이 사용되고 있다. 특히 그가 계속된 가난에서 벗어나 잡지 편집자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는 30년대 말에서 40년대 초의 시에서 감상에 젖어 있거나 기교에 탐닉하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 자신이 이러한 모더니즘적 취향을 단순히 ‘상황에 따른 산물’로써만이 아니라, 그의 무의식 속에 도사린 ‘소시민적 자의식’과 긴밀하게 연관시키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용악이 임화로부터 현실 그 자체에 대한 인식을 소박한 생활의 언어로 형상화하는 대신 현란한 기교에 치중한다는 애정어린 비판을 받게 되는 것도 이 무렵의 일어거니와,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생활의 변화가 그의 내면에 잠재해 있던 소시민성과 소외의식을 강화시킴으로써 나타난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요악의 모더니즘 취향은 그의 세계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기법적인 측면에 집중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용악의 기교의 습득과 언어에 대한 관심은 그로 하여금 다양하고 풍부한 표현법을 구사함으로써 보다 세련되고 풍부한 시를 쓸 수 있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현실을 폭넓고 깊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인식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게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용악에게 있어서 모더니즘적 취향은 그의 시적 성취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창작에 활력과 윤기와 풍부함을 더해주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모더니즘 기법은 이용악 시의 미학적 특징인 서사적 구조의 시들에서 새로운 시적 장치로 보완관계에 서게 된다.


2. 리얼리즘 경향의 시


이용악의 진면목은 동경에서 펴낸 『분수령』(1937)과 이듬해의 『낡은 집』(1938), 두 시집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이 시들을 통해 용악은 당대의 민족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리얼리스트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의 시편들은 피폐한 농촌 현실과 이농, 유랑과 국외이민, 그리고 도처에서 진행되던 굶주림과 죽음의 비참한 현실을 거의 직설적으로 노래한다. 이것은 그의 시가 당대 현실의 핵심적인 모순을 시화하는, 다시 말해 제국주의의 강압에 의해 수난을 겪던 식민지 민중의 현실을 그려내는 민족문학의 품격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가혹한 현실의 모습을 수식 없이 묘사하는 리얼리즘적 기율과 고통당하는 민중에 대한 애정 어린 음성이 결합함으로써, 그의 뛰어난 시에는 절실한 울림이 실리고 있었다. 1937년에 발표한 그의 첫시집 『분수령』은 그가 모더니즘 취향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창작 방향을 모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이 시집에서 시적 형상화의 대상으로 취택한 것 중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현실 그 자체, 특히 그 자신의 체험이나 가족사적 체험과 관련된 현실이다. <나를 만나거든>, <풀벌렛 소리 가득차 있었다>등의 작품은 그가 발견한 현실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소재의 현실성과 표현의 참신성에도 불구하고 아직 경험주의적인 한계가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전자의 경우는 가난과 그로 인한 노동의 체험을 다룬 작품이지만,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고, 후자의 경우는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가족사적 체험을 비교적 잘 형상화하고 있지만, 그것을 식민지 현실 전체와의 관련 속에서 그려내기 보다는 한 개인의 우연한 비극적인 체험으로 파악하는 것에 그침으로써 각각 본격적인 리얼리즘시로서는 일정한 한계를 보여준다.

즉 이 시들은 현실의 내적 관련성에 대한 인식보다는 현실의 비극성, 도저히 인식할 수도, 극복의 가능성도 발견할 수 없는 운명처럼 강고한 힘으로 버티고 서 있는 현실자체에 대한 소박한 인식을 진술하거나, 그 현실 속에서 가난의 고통을 겪고 있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기연민을 진술하고 있다. 이러한 개인적인 소재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이 시들은 시인이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려는 소박한 자세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이후의 발전을 가늠케 해준다. 이렇듯 용악은 자신의 개인적, 가족사적 체험을 통해 ‘생활의 발견’에 도달함으로써 비로소 전면적인 궁핍화의운명에 처한 민족의 보편적인 현실에 대해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물론 생활의 발견 그 자체가 리얼리즘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것을 빠뜨리고는 전반적인 식민지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 역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의 훌륭한 시적 성공은 무엇보다도 그의 체험이나 현실상황을 솔직하게 표현한, 다시 말하면 리얼리티가 충분히 반영된 생활의 시들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리얼리티를 시속에 끌어 들이기 위해 그는 서사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시에 있어서는 서사적 구조는 이미 카프의 임화 등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인데 그 양식적 실험이 이용악에 의해 완성되어진 느낌이다. 임화의 <우리오빠와 화로> 등은 시들이 거둔 성공에도 불구하고 격정적 감정의 분출과 주관적 정서에 치우치고 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이용악의 서사구조의 시들은 임화의 그러한 단점을 메타포나 심볼 등의 시적 방법과 긴밀한 구성으로 훌륭하게 극복하고 오히려 일정 수준의 문학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내용면에서는 카프의 영향을 방법적인 면에서는 모더니즘의 영향을 자신의 내면에서 훌륭하게 조화시켜 독특한 성취를 이뤄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서사구조의 이야기는 현실의 복잡다양한 리얼리티를 충분하게 반영할 수 있어 일제 강점기의 민족 현실을 노래하기에 알맞은 시적 형식이었다.31)

『분수령』이 보여주던 이런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소재는 『낡은 집』에 오면 민족 전체적인 것으로 넓어지며, 시적 대상도 전체적인 민족 현실로부터 고립된 어떤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현실 자체의 복잡한 내적 관련에 의해 산출된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단편적인 형상을 통하여 그 배후에 감추어진 객관적인 현실의 본질을 형상화해내는 것이 리얼리즘문학의 본령이라고 한다면, 『낡은 집』은 본격적인 리얼리즘 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를 포함하여 식민지 시대에 발표된 이용악의 리얼리즘시는 모두 식민지 현실의 비극성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보여 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합리적인 극복의 전망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파시즘의 노골적인 폭력화로 인해 민족의 현실에 대한 주체적 대응의 길이 완전히 차단된 30년대 후반 식민지 상황의 직접적인 반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전망의 부재는 이용악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낡은 집』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용악 시의 한 극점은 민중의 고통에 대한 이 같은 아픔의 정서가 당대 시인들에게 보기 힘든 우국의 열정과 결합하여, 민족해방에의 염원이나 전망으로 이어지는 데서 이루어진다.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믿음과 고통받는 민중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들의 미래에 대한 깊은 신뢰가 없이는 성숙한 리얼리즘의 경지는 열리지 않는다. 비통하나 절망하지 않고, 분노에 어려 있으나 증오하지 않는 사랑과 믿음의 목소리가 베어 있는 까닭에 그의 뛰어난 시들은 리얼리즘의 고유의 튼튼한 낙관론에 도달한다.

이용악의 문단활동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인문평론』 편집기사로 일하던 1939년 무렵에 본격화된다. 1939년부터 1942까지 신문 혹은 잡지에 발표한 것들을 모아놓은 시집이 1947년에 간행된 『오랑캐꽃』이다. 이 무렵의 작품들 중에서 여기에 실리지 못한 작품이 여섯 있는데32), 이는 이용악의 네 번째 시집 『이용악집』에 실리게 된다. 그러나 누락된 이 여섯 편의 작품은 이용악의 제 2기에 속하는 작품들이므로 이 시기로 논의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 시기의 용악의 시는 새롭게 변하게 된다. 이 시집의 창작시기는 39년부터 42년까지이지만, 47년에 간행된 점을 주목하면 이전의 시집들과 는 상당히 다른 형식성을 보여 준다. 특히 초기시의 중요한 특징이었던 강한 서사적 특성은 <전라도 가시내>를 비롯한 몇 몇의 작품에서 볼 수 있을 뿐, 대부분의 서사적 특성이 희미해짐을 느끼게 된다.33) 요컨대 이 시기의 이용악의 시는 서사성이 거의 사라지고 자아의 감정이 많이 노출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양상은 그의 후기 시들(사회적 리얼리즘 경향의시)에서 더욱 짙어진다. 여기서 형성된 시적 자아의 모습은 생장이 완전히 정지된 채 욕된 나날을 살아가는, 보기 흉한 곱사등이다. 그의 삶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구부러지고 파탄당한 삶이다. 그의 삶의 조건은 ‘엎디어 이마를 적실 샘물’조차 허용하지 않을 만큼 극히 왜소하게 압착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 삶은 ‘날이 갈수록 새로이 닫히는/무거운 문’에 눌려 있다. 이는 외적 강제에 의한 고통으로 암시되며 곧 일제의 혹독한 핍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


해방이 되자 곧 다시 서울로 돌아온 이용악은 문학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자신에 대한 후회와 반성 속에서 시작된 해방공간의 시작 활동은 목적의식이 강하게 드러나는 시를 쓰게 한다. 그의 이런 변모는 그의 내면적 갈등과정을 통해 필연적으로 얻어진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해방직후의 혼란한 문단상황 속에 순간적인 판단의 오류에 의한 것인가는 불명확하다. 그러나 그가 1946년 <大湖> 6월호에 발표한 전국문학자대회 인상기는 이러한 의문에 대해 많은 부분을 시사해 주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의 건설과정에 있어서 조선문학의 자유스럽고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전국문학자대회가 무엇을 결의하고 시사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문학이나 문학자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또 말로만이 아니고, 우리의 문학 실천이 진실로 민족 전원의 이익을 존중해서의 무기가 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그 의의가 클 것이다.

                                                  -<전국문학자대회인상기> 중에서-


위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용악이 해방공간에서 우선 순위를 두었던 것은 문학 그 자체보다는 민족 전원의 이익이었다. 그가 1946년 회원으로 가입하기도 했던 ‘조선문학가동맹’의 전국문학자대회(1946.2.8-9)에 일원으로 참가한 용악은 위의 글에서 진정한 조선문학의 기준은 ‘문학주의’나 ‘정치주의’에 있지 않고 얼마나 ‘민족적’이냐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민족우선의 사상은 이미 그의 궁핍했던 유년시절과 동경 유학시절을 거치면서 싹이 트고 뿌리가 깊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의 궁핍원인이 결국 역사적 모순에서 파생되고 있음을 깨닫고 그러한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몸부림쳤다. 그런 그가 민족적 역량이 꿈틀거리는 해방공간에서 좀더 적극적인 문학행동주의로 나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 시기 용악의 목적의식 시들은 1946년에 접어들면서 더욱 노골적인 이념시로 전락하게 되는데, 이러한 그의 변모과정을 뚜렷하게 하는 원인을 특별히 발견할 수 없는 점이 아쉽다. 그러나 이념시의 본질이 구호에 의한 선전선동에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평소에 그의 내면속에만 머무르던 민족의식이 밖으로 튀어나와 대타적인 행동성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방편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월계는 피어>, <오월에의 노래>, <노한 눈들>, <거리에서>, <기관구에서>, <빗발속에서> 등의 시들이 이런 경향에 속하는 시들이다. 이런 이념시들이 그의 철저한 공산주의의 신념에서 온 것은 아닌 듯하다. 민족의식의 고양된 감정이 시적인 통어없이 분출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34) 그러면 그는 왜 끝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수감되었던 서대문 형무소를 빠져나와 자진 월북하게 되는 것인지,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Ⅳ. 대표작 분석


1. 「북쪽」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 감을 줄 모른다.

                                  -「북쪽」전문


이 시는 시인이 어려서부터 늘 바라다보았던 북쪽 하늘 먼 곳에 대한 상념, 즉 여러 가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일화와 유년 체험, 그리고 고향에서의 모든 삶의 기억들을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응축시켜 떠올린 것이다. 여기서 보듯 그에게 고향은 아름다운 기억만으로 회상되는 곳은 아니다. 고향에서의 삶에 대한 그의 관점은 ‘시름 많은’이라는 표현으로 제시된 바, 추위와 경제적 고통, 그리고 민족사적 수난의 상처가 얼룩져 있는 비극적인 것이다. 이러한 고향에 대한 생각은 피식민지의 지식인으로서 시인이 지배국의 한복판인 타향에서 현해탄 건너를 바라보며 떠올릴 수 있는 일종의 상실감으로 나타나며, 이것은 “북쪽”이라는 상징적 언어를 중심으로 하여 이용악 시의 고향의식을 형성하고 규정하는 관념이 된다.

이처럼 그의 고향의식 형성의 토대가 된 일제하 유이민적 삶의 현실은 그가 겪은 유년 체험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실체를 드러낸다. 한국인이 러시아에 처음 이주할 때는 철종 12년인 1861년이라고 되어 있는데, 당시 제정 러시아의 영토였던 연해주, 특히 블라디보스톡(우라지오) 등에 여름이면 두만강을 건너가 농사를 짓고, 가을이면 귀향하는 빈곤한 농부와 품팔이들이 많았다고 한다.35) 이용악의 할아버지나 아버지도 이러한 부류의 유이민이었을 것이며 그러한 가족사적 체험은 민족의 보편적 경험을 반영하면서 시대적 질곡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시인 개인의 인식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2. 「풀벌레소리 가득차 있었다」


우리집도 아니고

일갓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寢床 없는 最後의 밤은

풀벌레소리 가득차 있었다

露領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마디 남겨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 灣의 파선도

설롱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쟎는 두 눈에

피지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깔안ㅅ고

어름짱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를 가르쳤다.

때 늦은 醫員이 아모말 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업듸여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寢床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소리 가득차 있었다.

                               -「풀벌레소리 가득차 있었다」 전문


어린 시절에 체험한 부친의 죽음은 시인에게 큰 충격을 남긴 것임은 분명하다. 시의 내용상 그의 부친은 러시아 땅을 넘나들며 가족들을 부양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는 바, 그 죽음이 고향이 아닌 곳에서의 일이었다는 점이야말로 그 충격의 현실적 의미를 말해준다. 그러나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그러한 비극적 상황성을 대하는 화자의 어조가 예상외로 차분하고 담담하다는 점이다. 즉 시적 화자는 기억 속에서 남아 있는 과거의 사실을 객관화된 자기 체험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마치 청자에게 말 건네듯이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용악의 초기시에서 볼 수 있는 표현상의 특징으로서 현실적 체험의 서사적 대상화와 화자의 담담한 어조를 통한 대상의 객관적 형상화는 그의 시에 나타나는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를 개인적인 자의식의 분출이 아닌 시대적 비극성의 형상으로 인식하게끔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개인적 체험의 편린들이 고향을 떠나 유랑하는 당대 우리 민족 구성원들의 현실적 모습으로 확산되어 시적 전형성을 확보할 때, 그의 시는 리얼리즘시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3. 「낡은 집」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 뒤 산을 마음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중략...)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고양이 울어 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좇아 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데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국만 눈 우에 떨고 있었다.

           (...중략...)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낡은 집」 부분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흉가의 내력, 즉 시베리아나 간도로 떠난 일가족의 비극적 삶이 배경이 되어 있는 이 시는 1920년대 후반 임화에 의해 시도된 소위 ‘단편서사시’와 같은 방식으로 시 속에 사건 내지 이야기를 담음으로써 객관적인 현실 묘사를 이루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즉 이 시의 화자인 ‘나’는 ‘털보의 셋째아들’인 ‘나의 싸리말 동무’ 일가족의 삶을 지켜보는 관찰자이자 동시에 그를 둘러싼 삶의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서술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사건의 객관적 제시를 가능하게 한다.36) 특히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시적화자는 서사의 전달자로부터 다시금 현재적 시선에서 고향 마을의 현실을 체험하고 서정적으로 인식하는 존재, 즉 서정적 주체로 탈바꿈하고 있는 바, 이를 통해 실향이라는 민족사적 비극의 현실에 대한 상실의 정서를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용악의 이러한 시작 방법은 이야기를 통해 현실적 인물들과 그들의 삶의 모습을 대상화시킨다는 점에서 시의 리얼리즘을 성취시키고 있으며, 이때 그 시적 대상에는 서정적 반응이 투사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이용악 시의 출발점적 동기가 된 고향의식이 그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인이 인식하는 고향상실의 구체적 정서는 곧 민족 전체의 상실감이라는 보편적이며 전형적인 정서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서정적 주체로서 시인이 지닌 상실감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 것인가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 다음 시다.


4.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나는 죄인처럼 수그리고

나는 코끼리처럼 말이 없다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너의 언덕을 달리는 찻간에

조고마한 자랑도 자유도 없이 앉았다.

             (...중략...)

지금

차는 차대로 달리고


바람이 이리처럼 널뛰는 강 건너 발판에

나의 젊은 넋이

무엇인가 기대리는 듯 얼어붙은 듯 섰으니

욕된 운명은 밤 우에 밤을 마련할 뿐


잠들지 말라 우리의 강아

오늘 밤도

너의 가슴을 밟는 뭇 슬픔이 목마르고

얼음길은 거츨다 길은 멀다


길이 마음의 눈을 덮어 줄

검은 날개는 없나냐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북간도로 간다는 강원도치와 마조 앉은

나는 울 줄 몰라 외롭다.

                             -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부분


여기서 간도와 연해주로 향해 국경으로서 두만강은 당시 실향 유이민들의 비원이 서려 있는 민족사적 상징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시에서 화자는 이 두만강을 인격적인 영감이 부여되고 감정이 이입된 시적 상관물로 대상화함으로써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표출하는 한편, 민족사의 비극을 함께 슬퍼하는 길벗으로서 타인과의 감정적 동일시를 통해 공동체적 삶의 의식을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곧 시대적 현실의 비극성에 고뇌하는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시인이 개인의 고뇌를 동시대 이웃에 대한 연민과 애정으로 확산시킨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인의 현실인식이 바로 ‘상실감’의 정서를 보편화하고, 그 속에서 주체적인 의지를 피력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시인은 시에서 화자가 청자로서의 ‘두만강’에게 “잠들지 말라”고 각성을 촉구하고 있는 바, 이처럼 화자로 하여금 어둡고 혼미한 식민지의 밤과 욕된 운명의 역사를 증언케 함으로써 비극을 극복할 수 있는 지평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5. 「오랑캐꽃」


- 긴 세월을 오랑케와의 싸흠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 꽃’ 이라 했으니 어찌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태를 드리인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년이 몇백년이 뒤를 이어 흘러 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도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들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게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 「오랑캐꽃」 전문

‘오랑캐꽃’을 객관적 상관물로 하고 있는 이 시는 자신의 터전을 쫓겨난 우리 민족의 현실을 알레고리화 하여 그려내고 있다. 즉 이 시의 화자는 표면상 드러나지 않는 함축적 화자인 동시에, 대상으로서 ‘오랑캐꽃’을 청자로 설정하여 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표백한다. 그리고 그 관념이란 곧 역사의 비극적 운명을 대변하는 ‘오랑캐꽃’에 대한 연민과 동일화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시적 대상인 오랑캐꽃의 울음은 시적 화자 자신의 울음이 되며, 이러한 감정이입의 방식을 통해 시인은 서정적 주체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인식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알레고리적인 비유는 현실의 전형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시인이 현실의 객관적 인식을 지속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동원한 기법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이용악의 시는 억압적 현실에 대한 시인의 내면풍경을 독백적으로 표출하는 양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뒷길로 가자」, 「등을 동그리고」, 「술에 잠긴 센트헬레나」 등의 작품에 이르면 식민지 지식인의 암울한 세계인식으로 확대되어 나타난다. 이처럼 시집 『오랑캐꽃』에 나타난 변화에 대해 당시 임화는, 이 시집에 실리지는 않았지만 「술에 잠긴 센트헬레나」를 평하면서 “적잖은 기교변은 차츰 경계를 요하며, 분수령의 소박하나마 생명력 있는 내용을 몇 개의 고운 말과 바꾸려 하는가.”37)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6. 「뒷길로 가자」


검은 하늘이 쏟아져 내린다

왼몸을 굽이치는

병든 흐름도 캄캄히 저물어 가는데

예서 아는 이를 만나면 숨어버리지

숨어서 휘정휘정 뒷길을 걸을라치면

지나간 모든 날이 따라오리라

        (...중략...)

푸르른 새벽인들 내게 없었을라구

나를 에워싸고

파리한 이마는 입술을 잊어버리고저

나의 해바래기는

무거운 머리를 어느 가슴에 떨어트리라


이제 검은 하늘과 함께

줄기줄기 차가운 비 쏟아져 내릴 것을

네거리는 싫여 네거리는 싫여

히 히 몰래 웃으며 뒷길로 가자

                           - 「뒷길로 가자」 일부


이 시는 이용악의 다른 시에 비해 시적 화자의 주체적 목소리가 전면에 부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서 시적 화자는 암울한 시대 상황에 짓눌린 식민지 지식인이 형상으로 드러나며, 그의 목소리는 자조적이며 무력한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이처럼 일제 말기 이용악의 시가 보여주는 바, 비극적 상황에 대한 저항의 비극성은 바로 검열을 의식한 위장의 시적 장치로서 창작을 지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에서 확인될 수 있다. 「길」, 「눈 나리는 거리에서」, 등 친일시의 혐의를 받는 작품들은 모두 일제의 대동아주의에 대한 찬양이라는 표면적 주제를 의도적으로 배반하려는 고통스런 현실 극복의 몸부림을 이면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용악 시는 일상적인 시어의 선택에 집중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 민족구성원의 현실적인 정서를 담아내려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다음의 시, 「전라도 가시내」에서 이러한 모습이 더욱 뚜렷해진다.


7. 「전라도 가시내」


알록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네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 소리도 호개 소리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드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미더운 복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메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히 잠거다오

                         - 「전라도 가시내」 일부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다고 표현한 것처럼 황량하기만 한 유이민 만주 땅 어느 술막에서 함경도 사내인 화자와 전라도 가시내가 마주 않아 있다. 대부분의 이용악 시애서처럼 여기서도 함경도 사내인 화자는 용악 자신이며, 따라서 온갖 역사적 질곡과 고통과 恨의 땅 만주에서 만난 전라도 가시내는 가난과 핍박에 억눌린 우리 민중이 된다. 그리하여 이 둘은 이미 남남이 아니라 오누이처럼 서로를 너무도 잘 아는 사이가 된다. 그래서 화자는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하고 강한 민족적 유대를 강조하고 있다. 또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한반도의 남쪽 끝인 전라도와 북쪽 끝인 함경도에서 온 두 사람이 주는 상징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이용악 시의 공간이 그 만큼 넓다는 의미 이상으로 한반도 전체가 구석구석 피폐해지고, 일제의 혹독한 통치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8. 「하나씩의 별」

무엇을 실었느냐 화물열차에

검은 문들은 탄탄히 잠기었다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열차의 지붕 우에

우리 제각기 드러누워

한결같이 쳐다보는 하나씩의 별


두만강 저쪽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쟈무스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험한 방에서 험한 변 치르고

눈보리 치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남도 사람들과

북어쪼가리 초담배 밀가루떡이랑

나눠서 요기하며 내사 서울이 그리워

고향과는 딴 방향으로 흔들려 간다

              -「하나씩의 별」 1, 2연


해방을 맞아 이국땅에서 유랑하던 민족구성원들이 서둘러 귀국하는 현실상을 그려내고 있는 이 시는 그들의 기쁨과 설레임의 심성이 생생하게 느껴지도록 귀국열차의 모습을 장면화하여 보여준다. 이것을 시인은 그의 시에 고유한 창작방법으로서 화자의 복합적인 활용을 통해 구체화하고 있는데, 이 시의 1연은 서정적 주체로서 화자가 상황을 말하고 있는 반면, 2연에서는 단순한 관찰자가 되어 시 속의 등장인물들의 행위와 의식을 기술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나’와 함께 귀국하는. 시적 화자의 관찰대상으로서 타인들을 ‘우리’라고 지칭함으로써 정서적 동일화를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곧 그가 지향하는 시의 서사적인 모습이 단순한 이야기의 재현이라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있음을 말해준다. 즉 서정적 주체가 체험하고 있는 현실적이며 현장적인 상황을 시적 대상으로 하고, 그 대상으로서 민족의 생활상을 기술함으로써 주체와 대상간의 정서적 동화는 물론 구체적인 현실의 서정적인 재현을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특히 이 시기 시에서 시행을 무시한 산문체의 형태구사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의 시에서 산문적 형태는 곧 자연스런 낭독과 일상적인 감정의 제시를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9. 「하늘만 곱구나」


집도 많은 집도 많은 남대문턱 움 속에서 두 손 오구려 훅훅 입

김 불며 이따금씩 쳐다보는 하늘이사 아마 하늘이기 혼자만 곱구나


거북네는 만주서 왔단다 두터운 얼음장과 거센 바람 속을 세월은

흘러 거북이는 만주서 나고 할배는 만주에 묻히고 세월이 무심찮아

봄을 본다고 쫓겨서 울면서 가던 길 돌아왔단다


띠팡을 떠날 대 강을 건널 때 조선으로 돌아가면 빼앗겼던 땅에

서 농사지으며 가갸거겨 배운다더니 조선으로 돌아와도 집도 고향

도 없고


거북이는 배추꼬리를 씹으며 달디달구나 배추꼬리를 씹으며 꺼무

테테한 아베의 얼굴을 바라보며서 배추꼬리를 씹으며 거북이는 무

엇을 생각하누


첫눈 이미 내리고 이윽고 새해가 온다는데 집도 많은 집도 많은

남대문턱 움 속에서 이따금씩 쳐다보는 하늘이사 아마 하늘이기 혼

자만 곱구나

                             -「하늘만 곱구나」 3-5연


이 시는 「하나씩의 별」과 시적 의미구조에 있어서는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즉 1연에서 예의 함축적 화자가 상황의 시적 의미를 제시하고 있으며, 2연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인물이 등장하여 함축적 화자가 들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형식을 통해 시적 인물의 현실적 삶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1연에서 하늘을 쳐다보는 주체는 남대문턱 움막에서 두 손을 불며 추위를 참는 사람인 바, 그는 2연의 거북네의 아이인 ‘거북이’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경우 시의 화자는 단순한 관찰자적 역할을 넘어서 일종의 전지적인 관점에 서 있으며, 이를 통해 시적 대상의 주체화를 가능케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시적 대상으로서 인물의 감정을 화자가 대신 말해주는 과정에서 서정적 주체인 시인의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이입하도록 함으로써 시인과 시적 대상의 정서적 동일화를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거북이는 무엇을 생각하누”와 같은 표현이 그 단적이 예이다. 이 말은 의당 함축적 화자인 시인의 말임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이 표현을 시적인물로서 ‘거북이’의 행동과 생각에 연결시켜 놓음으로써 이중적인 관점을 형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대상을 주체와 동일시하는 방법론, 즉 민족구성원으로서의 공동체의식을 시 속에서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해방기의 현실에서 문학을 통해 민족적 삶의 가능성을 실천적으로 탐색하는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빚어진 현실적 모순과 고통은 다시금 시인에게 민족적 비극으로 비치게 되었고, 시에서 화자의 비판적인 목소리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끔 한다.


10. 「기관구에서」


핏발이 섰다 집마다 지붕 위 저리 산마다 산머리 우에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의 핏발이 섰다


누구를 위한 철도냐 누구를 위해 동트는 새벽이었나 멈춰라 어둠

을 뚫고 불을 뿜으며 달려온 우리의 기관차 이제 또한 우리를 좀먹

는 놈들의 창고와 창고 사이에만 느려놓은 철길이라면 차라리 우리

의 가슴에 안해와 어린 것들 가슴팍에 무거운 바퀴를 굴리자

                                         -「기관구에서」 1.2연


‘남조선 철도파업단에 드리는 노래’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는 1946년 9월 총파업의 주축이 되었던 용산 기관구의 철도파업을 다루고 있다. 그만큼 이 시는 현실적인 사건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사건의 진행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용악이 일관되게 고수해 온 리얼리즘시로서의 서사지향성에 새로운 국면을 형성한다.

이 시에 나타난 ‘우리’는 앞서 본 「하늘만 곱구나」에서의 ‘우리’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즉 「하늘만 곱구나」에서는 서정적 주체인 ‘나’와 연결된다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주체화된 시적 대상이었던 반면에, 여기서는 본격적인 시적 화자로 등장한다. 즉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그들이 겪는 현실을 현재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시’적인 면모를 시적 화자의 직접적인 가치 판단에 의존하기 때문에 리얼리즘시의 성취와는 거리가 있다.38) 이 시의 산문적 형태가 비록 낭독성과 일상적 감정의 환기라는 동일한 효과를 고려하고 있다 하더라도 시적 화자가 대상의 성격상 그러한 효과는 노동자들에 대한 선전선동이라는 현실적 목적에 종속됨으로써 비판적이고 성찰적인 의미는 탈락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 시의 화자가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이듯 청자는 시적화자와 같이 파업에 가담한 동료들이 될 것이다. 이러한 당파적 태도는 한편으로 그의 ‘무기로서의 시론’이 정치적 성향을 띠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나 혁명적 열정으로 치달았던 해방기의 현실의 실천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보면, 이러한 산은적 형태는 현장성이나 체험의 역동성과 같은 시적 리얼리티를 확보하도록 해주는 시적 의도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Ⅴ. 시사적 위치


이용악의 시세계는 민족 현실의 탐구라는 일관된 주제를 바탕으로 우리 현대시의 리얼리즘적 가능성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시가 우리의 근대사적 현실 속에 투영된 민족 구성원의 구체적 삶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즉 이용악은 30년대의 모더니즘의 주지적 기법을 차용하면서 20년대 소월로부터 흘러온 토착적 서정성을 기반으로 불행했던 자신과 이웃 그리고 민족 구성원 모두의 삶에 나타나는 역사적, 민족적 의식을 사실적 방법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압박받는 민중의 삶에 대한 이용악의 치열한 시정신은 한국 시문학사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이런 이용악 시의 특징은 모두 시의 창작과정상 리얼리즘적 본질을 구현하는데 기여한 데 그 의의가 있다. 그것은 특히 함축적 화자를 서사적 구조와 형태를 통해 다양하게 활용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진다. 즉 시인의 이러한 방법론은 시 속에서 서정적 주체의 현실에 대한 객관적 관찰과 동시에 그러한 현실의 의미에 대한 주체적 성찰 내지 비판을 가능케 해줌으로써 단순한 현실 반영을 넘어서 민족 현실의 체험적이고 정서적인 동화를 이루어낸 것이다.

요컨대 이용악 시의 우수성은 무엇보다도 일제강점기 유이민의 비극적 삶과 해방직후 귀향 이민들의 비극적 현실을 날카롭게 파헤침으로써 민족적 삶의 모순 구조를 비판적으로 형상화해 낸 데 있다. 특히 그의 시는 삶의 구체적 현장성을 이야기적인 배경과 시적 주인공이라는 장치를 통해 반영하는 한편, 냉정하면서도 진지하고 진솔한 시적 화자의 목소리로써 서정성을 잃지 않음으로써 우리 현대 시사의 전개 과정에서 리얼리즘시의 토대를 정당하게 구축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