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시대의 방랑자 - 이용악의 시
감태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경계
이용악이 살았던 경성읍은 "우라지오 바다"며 "아라사 벌판"으로 진출하는 관문 노릇을 하는 국경도시였다. 이용악의 조부는 여기서 일찍부터 몸소 소달구지에 소금을 싣고 아라사(阿羅斯, 러시아)를 넘나들었다. 이 일은 그의 부친 대(代)에도 계승되었으며 이 일로 하여 이용악은 어릴 무렵 부친을 잃고 말았다. 실제 이용악의 어릴 때 집은 남문 밖 시장 거리에 근접해 있어서 이 같은 사실을 밑받침해 주고 있는데 이를 종합해 볼 때 그의 계층적 성분이 기층인 소상공인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밝혀진다. 이용악의 이 같은 계층적 특성은, 인구 2만 5천의 국경도시 경성과 일본 유학 등 모더니즘 문학 세대의 도시 체험을 갖추었으면서도 끝내 도시문학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의 도시 체험은 국수장수·떡장수·계란장수로 생계를 꾸린 어머니의 생활 영역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빈곤과 고통의 체험에 다름 아니었다.
빈곤으로 인한 물질적 정신적 고통은 죠오지 대학 유학 시절이나 서울에서 인문평론사의 기자를 하던 시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온갖 가지의 품팔이 노동꾼으로 고생하며 학업을 지속해 갈 수밖에 없었던 유학 시절의 도시 체험은 이용악으로 하여금 김기림이나 김광균과 같은 도시적 상상력에 쉽게 근접할 수 없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당시 문단의 모더니즘적 추세를 도외시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자기 나름의 시적 태도를 견지한 데에는 이러한 사정도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용악의 이 같은 계층적 성분은 자연스럽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죠오지 대학 재학 시절 만주 등지를 두루 여행하면서 그곳의 궁핍한 사람들의 삶을 확인하고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용악의 계층적 성분 문제에서 하나 더 검토해야 할 사실은 그의 가족사에서 확인하게 된 상인적 기질의 문제이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국경을 넘나드는 상인이었으며(규모에 관계없이 무역 상인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어머니 역시 앞에서 설명한 바대로 난전(亂廛) 상인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용악의 가문이 모두 현실 파악 능력과 또 그에 대한 적응 능력이 남달랐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아라사 등지로 일종의 밀무역업을 다니면서 새로운 문물과 환경을 접하고, 나아가 시대적 상황에 대한 대국적(大國的) 이해나 통찰을 가능하게 하였을 것이다.
이 점은 조선 후기 신분 사회에서 주로 역관을 비롯한 중인 계층이 그 사회의 기능 집단 노릇을 하며 서구 문물을 남달리 먼저 주목했던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근대의 개화 인맥이 바로 이들 중인(中人) 계층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나아가 신문학의 형성에도 최남선을 비롯한 이 계층 사람들의 역할이 컸던 점은 우리 문학사에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소상인 집안 출신으로서의 이용악의 계층적 성분은 바로 이 같은 역할에 견줄 만한 것이며 두 가지 측면에서 그의 시문학 세계를 이해하는 단서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의 시작(詩作)의 출발점이 카프계의 생경한 프로 시와 모더니즘의 장식적 도시 풍경 시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침체와 새 방향 모색기에 든 생경한 목적의식 위주의 리얼리즘을 일정한 한계와 함께 이해했던 소치이며, 모더니즘 문학 역시 상승기에 있었다고는 하나 자신의 계층적 성향과 일정한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모더니즘 문학과 리얼리즘 문학의 중간지에 그의 시의 출발점을 설정한 데에는 암암리에 세대의식도 개입되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1939년부터 리얼리즘 문학계에서부터 신세대론이 본격화되었으며 모더니즘계에서도 나름대로 자신의 한계를 의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현실과 자아의 갈등 양상
이용악의 시는 1930년대 한국 시의 모더니즘적 영향을 감안하더라도 그것을 압도할 정도로 자서전적이며 구체적 현실의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점은 그의 시가 주관적 경향에 서 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주관적 경향 또는 그런 요소야말로 시인의 내면 의식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용악 시의 주관적 요소들을 통해서 내면 세계로 접근해 들어가면 이 시인은 초기의 개인적 절망감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아의식을 점점 확대해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개인적 고난과 좌절감이 개인을 넘어선 자기 둘레의 이웃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아의식의 확대는 그 흐름이 단선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의식상으로 보면 여러 굽이의 굴곡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 여러 굽이를 지배하는 색조가 있다면 대체로 어둡고 칙칙한 것이 특징이다. 이런 어둡고 칙칙한 색채는 당대의 역사적 민족적 고난과 아픔에 연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용악의 시는 바로 어둠과 고통 속에서 한 시대를 산 체험의 기록인 것이다.
이용악의 시 세계는 시집 『분수령』과 『낡은 집』을 통해서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직접적인 것으로서 아버지의 이른 죽음과 그로부터 겪게 되는 생활고(개인적인 고난과 좌절감의 세계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사회적 현실과 관련된 궁핍화 현상)와 또 하나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선 이웃과 공동체에 관련된 세계이다. 이용악의 의식 속에 아버지의 죽음은 매우 커다란 충격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런 사정은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시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분수령』의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낡은 집』의 「너는 피를 토하는 슬픈 동무였다」, 『오랑캐꽃』의 「달 있는 제사」, 「다리 우에서」 등의 작품이 그 보기이다.
우리집도 아니고
일가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最後)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領)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마디 남겨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만(灣)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갈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를 가르쳤다
때 늦은 의원이 아무 말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最後)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이용악에게 "니는 애비 없이 자란 가난한 사내"(「너는 피를 토하는 슬픈 동무였다」)라는 굴레를 씌워 주었고, 또 새로운 삶을 위한 각오를 다지게 한다. 이 경우, 새로운 삶을 위한 각오란, 피폐한 마을에서 쪼들리며 살아야 하는 "평범한 인습"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말하자면 절박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될 다급함이 닥쳐온 것이다.
이향(離鄕)과 귀향(歸鄕)의 악순환
동무야
무엇을 뒤돌아보는가
너의 터전에 비둘기의 단락(團樂)이 질식한 지 오래다
가슴을 치면서 부르짖어 보라
너의 고함은 기울어진 울타리를 멀리 돌아
다시 너의 귓속에서 신음할 뿐
그 다음
너는 식욕의 항의에 거꾸러지고야 만다
기름기 없는 살림을 보지만 말아도
토실토실 살이 찔 것 같다
뼉다구만 남는 마을······
여기서 생활은 가장 평범한 인습이었다
가자,
시원히 떠나가자
흘러가는 젊음을 따라
바람처럼 떠나자
- 「도망하는 밤」 중에서
이 작품에서 보면 그가 인식하고 있는 고향은 불화의 세계이다. 살림살이는 쪼들릴 대로 쪼들려 견딜 수 없이 피폐한 공간이다. 결국 가난을 타개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간다. 그러나 타향이란 고향보다 더 싸늘한 삶의 질서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서글픔과, 타향 공사장에서 겪어야 하는 괴로움의 이중적 압박감은 그로 하여금 매몰찬 인간으로 변모하게 한다.「도망하는 밤」에서 "뼉다구만 남은 고향"이기에 "시원히 떠나자"고 하여 아무 미련 없이 떠나온 화자는 「항구」에서는 다시 망향의 시름에 잠긴다. 이런 사정은 「고독」에서,
땀내 나는
고달픈 사색 그 복판에
소낙비 맞은 허수애비가 그리어졌다
모초리 수염을 꺼리는 허수애비여
주잖은 너의 귀에
풀피리 소리마저 멀어졌나봐
라고 노래된다. "소낙비 맞은 허수애비"는 시인의 고달픈 사념을 표상한다. "땀내 나는" 막노동에 시달린 나머지 "주잖은 너의 귀에 / 풀피리 소리마저 멀어"진 허수아비는 시인의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이상과 귀향 사이에 찢긴 괴로운 실존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말하자면 그의 삶을 편히 영위할 수 있는 곳이란 고향 아니면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다시 기회가 닿는 대로 어느 때든 돌아갈 것을 염원한다.
둘째 시집 『낡은 집』에 이르면 그런 염원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연못」이라는 시에서는 "밤이라면 별모래 골고루 숨쉴 하늘 / 생각은 노새를 타고 / 갈꽃을 헤치며 오막살이로 돌아가는 날"로 되기도 하고 「아이야 돌다리 위로 가자」에서는 "돌담 밑 오지항아리 / 저녁별을 안고 망설일 지음 / 우리 아운 나를 불러 불러 외롭단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여기서 "돌담 밑 오지항아리"는 고향의 정경을 환기한다. 단순한 그냥 오지항아리가 아닌 "돌담 밑 오지항아리"라는 표현은 고향에 대한 시인의 정서를 나타낸다. 이런 정서는 "저녁별"과 함께 한결 구체적인 고향의 정조를 띠면서 시인으로 하여금 아우가 자기를 부르고 있는 것 같은 환영을 갖게 한다. 이와 같은 고향 생각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나아가 시인의 간절한 소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시 「고향아 꽃은 피지 못했다」에서는 이용악이 고향과 타향을 전전할 수밖에 없는 정신적 상황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화자는 먼저 "돼지굴 같은 방"에서 "가슴 한구석이 늘 차거웠길래" "도망하고 싶던" 마음을 누를 수 없고, 그리하여 "마음의 불꽃을 거느리고" 멀리 낯선 곳으로 "드디어 나는 떠나고야" 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향의 부드러운 손은 화자의 가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타관을 헤매며 "살길 어두울 때" 또는 갈 길을 잊고 거리에 비석처럼 우두커니 서 있어야 할 때일수록 고향의 "부름이 귀에 담기어짐을 / 막을 길이" 없다. 결국 다시 먼 길을 돌아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실제로 고향에 돌아왔을 때 "가슴에 가로누운 가시덤불"은 가시지 않고 사늘한 바람만 불어올 따름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슬픔이 물결처럼 막막하게 일어난다. 화자는 다시 고향의 품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이와 같은 심리 구조는 '막막한 고향 → 떠남 → 막막한 타향 → 고향으로의 귀환 → 막막한 고향 → 떠남'의 악순환의 구조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고향과 타향을 전전해 보지만 어느 곳에서도 가슴에 꽃을 피울 수 없는 깊은 고난 속에서 갈등은 더욱 심화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버지의 죽음과 그로 인해 자신에게 닥쳐온 슬픔과 가난에 대한 체험은 줄곧 이용악의 시의 한 근간으로 드러난다. 이 점은 아버지의 제삿날 밤 내내 우시는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달 있는 제사」라든가, 생계를 위해 어머니가 국수집을 해서 "국수집 아이"로 통했다는 기억, 그리고 단오도 설도 없이 일을 해야 했지만 "아버지의 제삿날만은 일을 쉬고 / 어른처럼 곡을 했다"는 기억을 시화(詩化)한 「다리 우에서」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린 나이에 겪은 그 충격의 부피가 얼마나 컸으며, 또 그에게 끼친 영향이 얼마나 깊었던가를 증명한다.
절망과 공동체 의식
이용악이 개인사적 고통으로부터 의식을 확대해 갔을 때,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주변 이웃들의 생활상이다. 자신과 동일한 이웃들의 궁핍상은 곧 당대의 보편적 피폐 현상을 의미한다. 이런 피폐 현상은 『분수령』의 「만추(晩秋)」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돌개바람이 멀지 않아
어린것들이
털 고운 토끼 껍질을 벗겨
귀걸개를 준비할 때
기름진 밭고랑을 가져 못 본
부락민 사이엔
지난해처럼 또 또 그 전해처럼
소름 끼친 대화가 오도도오 떤다
- 「만추(晩秋)」 중에서
"지난해처럼 또 또 그 전해처럼" 대물림되는 궁핍상을 극복하는 길이란 여러 가지가 있다. 척박한 땅을 개척하여 옥토로 바꾼다든가 새로운 땅을 개간하든가, 노력 여하에 따라 극복 가능성을 가지는 것이지만 이런 노력들이 쉽지 않다고 생각할 때 가능한 일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고향을 등지고 새로운 곳으로 이주해 가는 일이다.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당대의 적잖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나섰다. 이런 유민(流民) 현상은 말 그대로 당시의 민족적 궁핍화 현상을 적나라하게 증명해 준다. 더욱이 고향보다 나을 것으로 짐작하고 이주해 간 그 북쪽 땅이 고향보다 더 암담한 곳이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고통의 심도를 짐작하고도 남게 한다. 1920~30년대의 유민 현상은 그 규모가 작지 않았다. 다소 주의를 요하지만 「낡은 집」에 보이는 "털보네"의 이향(離鄕)도 당시의 그런 유민 현상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굴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중략)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데론지 사라지고 이튼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욱만 눈우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 「낡은 집」
이 작품은 사실주의적 기법과 선명한 서사적 구조를 통해 당대의 비극적 실상을 그려 낸 수작으로 꼽힌다. 털보네의 앞날이 결코 평탄치 못하리라는 전망을 하게 되듯이 남아 있는 부락민들 또한 사정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점을 쉽게 간취할 수 있다. 당시의 역사에서 확인해 보는 것처럼, 날로 가중되는 일제의 경제적 침탈과 뿌리 뽑힌 듯 의지할 수 없는 현실만이 그들 앞에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극악한 현실 인식은 첫 시집 『분수령』보다 『낡은 집』에서 더욱 강렬하게 나타난다.
보리밭 없고
흐르는 뗏노래라곤
더욱 못 들을 곳을 향해
암팡스럽게 길 떠난
너도 물새 나도 물새
나의 사람아 너는 울고 싶고나
- 「그래도 남으로만 달린다」
인용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화자는 현재의 절망적인 상황이 개선될 가능성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극악한 현실에 대한 비극적 인식은 절망감을 낳지만 절망감은 또 언제나 극복의 몸짓을 낳는 근원이 된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정신 상황의 끝없는 순환이 인간의 부정적 역사 인식과 낙관론을 가져오는 것이다. 비록 이용악 시의 기본 구조가 비극적 현실 인식에 있다 하더라도 밑바탕의 정신적 구조는 같은 뿌리의 다른 줄기인 절망감과 극복 의지로 대별되는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이 두 극점의 부침에 따라 그의 의식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기도 하고, 또 솟아나기도 한다. 이 점이 바로 그로 하여금 깊은 고뇌와 갈등 속에서도 절망의 수렁으로만 깊이 빠지거나 어떤 절대에의 세계로 영원히 도피하지 않도록 하는 자기통제의 구실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제 말기의 시 : 자의식의 위축과 확대
이용악의 전체 시를 일별하면 그의 심성은 매우 여린 듯하다. 그러면서도 때로 비정하리만큼 단단한 일면이 드러난다. 이 상반된 두 정신적 요소가 그의 시에 서정성과 사회의식으로 요약되어 각각 분출되고 있으며, 특히 전자가 훨씬 우세하다고 판단된다. 앞에서 살핀 결과에서도 확인되거니와 일제 말기나 해방 공간에서 쓴 시들도 그 점은 대동소이하다. 특히 약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1942년에 쓴 몇몇 작품들이 친일 시(親日詩)의 혐의를 받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도 '민족 해방', '우국 열정' 운운하는 거창한 문제에는 그렇게 철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친일'의 혐의를 받을 수 있는 시를 썼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국가나 민족관에 철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며, 여기서 이용악의 시가 셋째 시집 『오랑캐꽃』에 오면 개인사적 측면이 더 우세해진다는 논리는 타당한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실제로, 조금씩 확대되어 오던 그의 공동체 의식이 현저히 축소되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서정성이 강화되고, 시적 세련미가 두드러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그의 의식이 다시 위축되고 있다는 증거가 되겠지만 여기서 고려되어야 할 것은 외부의 압력이다. 즉 타율에 의해 시적 운신의 폭이 그만큼 좁아진다는 사실이다.
들창을 열면 물구지떡 내음새 내달았다
쌍바라지 열어제치면
썩달나무 썩는 냄새 유달리 향그러웠다
뒷산에두 봋나무
앞산두 군데군데 뒷산에두 봋나무
주인장은 매사냥을 다니다가
바위틈에서 죽었다는 주막집에서
오래오래 옛말처럼 살고 싶었다
- 「두메산골 1」
이 작품의 표면에서 현실 인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 전통적인 풍물과 향토색 짙은 두메산골의 향취에 경도되는 의식이 또렷이 부각된다. "물구지떡 내음새"라든가 "썩달나무 썩는 냄새 유달리 향그러웠다"라는 표현의 근저에 깔린 토속 지향적 의식에서 이용악의 강렬한 자연 회귀 의지를 읽게 된다. 이 의지는 "오래오래 옛말처럼 살고 싶었다"에서 확인된다. 이런 사정은 「두메산골 2」의 "온 길 갈 길 죄다 잊어버리고 / 까맣게 쓰러지고 싶다" 같은 표현에서 한결 분명히 드러난다. 지나온 길도, 앞으로 걸어갈 길도 죄다 잊어버리고 싶을 만큼 과거와 미래가 모두 부정적으로 인식될 때, 까맣게 쓰러지고 싶은 충동이란 곧 이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영원의 세계에 들고 싶다는 마음의 움직임에 다름 아니다. 비록 지독한 비극적 인식에서 기인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움직임은 현실적으로 쉽게 물리칠 수 없는 인간의 보편적 심정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될 것은 그것이 '-싶다'라는 원망형(願望形)이라는 점이다. "오래오래 옛말처럼 살고 싶다", "까맣게 쓰러지고 싶다"라는 것은, 따라서 의식 속에서만 작용하는 하나의 정신적 상황일 뿐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되기 어렵다는 의미가 내재해 있다. 따라서 화자는 지금 몸만 두메산골에 잠시 와 있을 따름이지 의식은 이미 다른 곳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른 곳이란 어디인가? 다음 시에서 그 지향점의 실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참나무 불이 이글이글한
오지화로에 감자 두어 개 묻어놓고
멀어진 서울을 그리는 것은
도포 걸친 어느 조상이 귀양 와서
일삼던 버릇일까
돌아갈 때면 당나귀 타고 싶던
여러 영에
눈은 내리는데 눈은 내리는데
- 「두메산골 3」
이 작품에서 보면 의식의 지향처는 '서울'이다. 화자는 두메산골에 들어가 있지만 마음은 "멀어진 서울"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서울이란 예나 지금이나 정치·사회·문화의 중심지이며, 당대적 현실의 공간이다. 따라서 그의 의식이 서울을 지향하고 있음은 곧 그 꿈이나 이상을 펼치고 싶은 간절한 원망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화자가 서울 지향적 의식을 역사적 사실과 관련하여 표현하고 있는 점이다. 즉 함경도가 유배지로 많이 이용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대어 자신이 바로 그 옛날에 귀양살이 온 어떤 조상의 후예일 수도 있다고 유추하는 것이 그것이다. 귀양 온 조상이 한시라도 빨리 복권하여 언젠가는 "당나귀 타고" 다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듯, 지금 서울을 그리는 그 심정이 곧 그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서울 지향성이 원초적인 것이며, 회귀본능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고 있는 것이다. 끝 2행에서 보듯 이 전망이 결코 밝지만은 않다. 여러 고개에 눈이 자꾸 내리고 있으며 눈이 오는 만큼 자꾸 지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이용악 시에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의식의 상반된 두 갈래를 다시 확인한 셈이다. 즉 시의 문맥 속에서 함축되어 있는 은둔적·초월적 자세와 그에 반하는 서울 지향 의식이 그것으로 이 두 의식은 이용악의 고뇌의 실체인 것이다.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중략)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히 잠궈다오
- 「전라도 가시내」 중에서
이 시는 1940년 8월에 쓴 작품으로 되어 있다. 작품의 창작 시기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으므로 시인의 정신적 변화를 검토해 볼 수 있다. 이 시에 의하면 이용악의 정신적 상황은 상당히 달라져 있다. 감상적 분위기가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앞의 시와 비교해 볼 때 한결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한편 이 시에 언뜻언뜻 내비치던 공동체 의식 내지 민족애는 이보다 다시 약 두 달 정도 뒤에 쓴 것으로 되어 있는 「오랑캐꽃」에서는 좀 더 강하게 발현되어 보다 깊은 역사의식으로 나타난다.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었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게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 「오랑캐꽃」
여기서 역사 인식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의 하나는, 쫓는 자의 입장으로서의 "고려 장군님"이 쫓기는 자로서의 우리 민족으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역전의 관계를 실현시켜 주는 것이 바로 2연의 역할이다. 몇백 년의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 역사는 반전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시는 역사의 무상함과 반전된 역사의 현실 속에서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하는 연약한 민족적 현실에 대한 연민의 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가 민족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음에도 당당히 발표될(『인문평론』, 1940. 10. 4)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우회적인 표현방법에 직결된다고 하겠다. 이 같은 성공적인 예가 언제나 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시적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후의 작품에서 더 이상 이런 성공적인 예를 접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이 점을 증명하고 있다. 말하자면 일제의 조직적이고 강압적인 힘의 지배가 날로 강화되는 것과 비례해서 이용악의 시는 다시 어두워지고 관념화된다. 이것은 곧 타율적인 압력을 시적으로 극복해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정신적인 갈등도 심화되는데, 특히 그의 시인으로서의 갈등은 이른바 친일 시 여부로 논란이 일고 있는 몇몇 작품을 쓰게 되는 1942년에 한층 깊어진 것 같다. 그가 이후 해방되기까지 작품 활동을 하지 않은 문제도 그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해방 공간의 시 - 자기반성과 역사 인식의 표출
1942년 6월 「구슬」이라는 작품을 『춘추』지에 발표한 것을 끝으로 작품 활동을 중단했던 이용악은 해방되던 해인 1945년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 『해방 기념 시집』에 「시골 사람의 노래」를 수록하면서 작품 활동을 재개한다. 여기서 그는 "몇 마디의 서양말과 글 짓는 재주와 / 그러한 것은 자랑 삼기에 욕되었도다"라고 하면서 글 쓰는 이로서의 욕되었던 회한을 토로한다. 이 진술은 아마도 그가 타의에 의해 왜곡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자탄이 아닌가 추측된다. 곧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것은, 아니 그것을 읽는다는 것만으로써도 충분히 사상범으로 취급"(이용악, 「전국문학자대회 인상기」)될 정도의 폭압적인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자기를 속이고 왜곡된 글을 썼던 사실에 대해 자기반성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돌아온 서울은 광복의 환희도 잠시뿐 또 다른 혼란과 어려운 국면으로 빠져든다. 이런 와중에서 이용악의 갈등도 빛깔과 무게를 달리하며 다시 심중에 자리 잡기 시작한다.
자유의 적 꼬레이어를 물리치고저
끝끝내 호올로 일어선 다뷔데는 소년이었다
손아귀에 감기는 단 한 개의 돌멩이와
팔맷줄 둘러메고
원수를 향해 사나운 짐승처럼 내달린
다뷔데는 이스라엘의 소년이었다
(중략)
이미 아무것도 갖지 못한 우리
일제히 시장한 허리를 졸라맨 여러가지의
띠를 풀어 탄탄히 돌을 감자
나아가자 원수를 향해 우리 나아가자
단 하나씩의 돌멩이일지라도 틀림없는
꼬레이어의 이마에 던지자
- 「나라에 슬픔 있을 때」
이 작품은 골리앗과 다윗의 성서 이야기에 빗대어 "나라의 슬픔"을 타개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진술하면서 역사 인식과 민족의식에 충일한 시인의 의지를 표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의지가 해방을 맞이하고 자신의 욕된 과거에 대한 회한과 반성을 통해 도달한 적극적 태도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반대편에는 또 여린 심성으로서의 소극적인 자아가 놓여 있다. 그의 정신적 구조의 기본 골격처럼 보이는 이 양면성이 그에게 갈등을 부추기는 요소임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거니와, 이 점은 해방 공간에서 쓴 다음의 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불빛 노을 함빡 갈앉은 눈이라 노한 노한 눈들이라
죄다 바숴진 창으로 추위가 다가서는데 몇번째인가 어찌 하여 우리는 또 밀려나가야 하는 우리의 회관에서
더러는 어디루 갔나 다시 황막한 벌판을 안고 숨어서 쳐다보는 푸르른 하늘이며 밤마다 별마다에 가슴 맥히어 차라리 울지도 못할 옳은 사람들 정녕 어디서 움트는 조국을 그리는 것일까
폭풍이어 일어서는 것 폭풍이어 폭풍이어 불길처럼 일어서는 것
구보랑 회남이랑 홍구랑 영석이랑 우리 그대들과 함께 정들인 낡은 걸상이며 책상을 둘러메고 지나간 데모에 휘날리던 깃발까지도 소중히 감아들고 지금 저무는 서울 거리에 갈 곳 없이 나서련다
내사 아마 퍽도 약한 시인이길래 부끄러이 낯을 돌리고 그저 울음이 복받치는 것일까
불빛 노을 함빡 갈앉은 눈이라 노한 노한 눈들이라
- 「노한 눈들」
이 시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자신을 드러내 주고 있다. 이 작품의 여러 곳에 보이는 남루한 현실과 "노한 눈"들로 상징되는 진보 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낭패감, 또 그런 처지에서도 "새로운 조국을 그리고"(설계하고)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 끝내 "폭풍"(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것인 듯함)이 "불길처럼 일어"설 것이라는 미래에의 전망 등과 현실을 자세히 성찰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양면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같은 자아 인식 속에는 어느 정도 부끄러움이 있게 마련이지만 그의 소극성을 보상해 주는 것은 아니다. 결국 "저무는 서울 거리에 갈 곳 없이 나서련다"는 그의 무정향성을 통해 고뇌와 방황으로 채색된 비극적 실존을 엿보게 될 뿐이다. 또한 의식과 현실의 실존이 상응하지 못하는 괴리감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해방 공간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러한 두 개의 정신적 상황은 좀 더 실천적인 문제로 기울어진다. 이를테면 "우리의 문학 실천이 진실로 민족 전원의 이익을 존중해서의 무기가 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그 의의가 클 것"이라는 진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용악 문학의 실천적 측면, 즉 민족과 현실의 이익을 직접 추구할 수 있는 무기로서의 문학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문학관은 그의 정신의 한 단면으로 지적한 바 있는 사회의식의 확대라 할 수 있다. 이용악이 이후에 사회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1950년을 전후로 작품 활동을 못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면서 앞서 월북한 이태준·임화·김남천·임화남·오장환 등이 서울에 나타났고 이때 많은 문인들이 납북 또는 월북하였다. 이용악도 이때 이광수·박영희·김억·김기림·박태원·설정식 등과 함께 북행하였으며 전쟁이 끝나갈 무렵 북의 종군작가단에 끼어 잠시 남하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이용악은 월북 이후 임화계(系)로 분류되어 '공산주의를 말로만 신봉하고 월북한 문화인'으로 지목받고 반 년 이상 집필금지를 당했다 한다. 해방 직후 중앙신문사에 재직하면서 서울 의주로 1가로 주소가 밝혀져 있었던 그는 1950년에는 《조선인민보》(7월20일자)에 「원쑤의 가슴팍에 땅크를 굴리자」와 같은 구호 일변도의 시를 썼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그러나, 그가 '말로만 공산주의를 신봉했다'는 사실은 명분보다 현실을 앞세울 수 있는 현실감각의 소치로 보아도 좋을 듯싶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이용악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종합을 완성했는가?
모더니즘은 1930년대 중반에 와서 이윽고 그 말류(末流)의 손으로, 언어의 말초화로 타락되어 갔는데, 이것은 당시의 국제적 정세(문명의 전망)가 점점 심각하게 어두워져 갔기 때문이다. 김기림은 여기서 모더니즘과 경향 시의 종합화를 시단의 새 진로로 제시하였다. 그 실질적인 예로서 카프계 시인들의 언어에 대한 자각을 들고 이는 모더니즘의 자극에 의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러고 보면 그 당시의 시의 새로운 방향성은 사회성과 모더니즘의 종합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김기림의 모더니즘에 대한 평가는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는 것으로서, 사실상 이런 방향성을 나름대로 작품에서 실천한 것이 이용악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2. 이용악은 친일 시인인가?
이용악의 계층적 성분에서 비롯된 현실 인식 능력은 명분보다는 실질 우선의 감각과 기형적으로 물려 있다. 1930년대 전반기를 통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제창한 이론가들이 그 이론의 질곡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시인들 또한 구호나 슬로건류(類)의 작품을 쓸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하나의 명분 내지는 정명주의(正名主義)에 함몰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이용악은 당대의 시의 기류에 침윤되면서도 그 나름의 유연성 있는 대응과 변모를 해나갔다고 하겠다. 이런 사정은 앞에서 말한 그의 현실감각과 그리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용악의 시에서 '친일 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일련의 시편들 또한 이와 같은 이용악의 감각에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3. 이용악의 시사(詩史)적 입지를 조명한다면?
카프계의 리얼리즘 문학 퇴조와 모더니즘 문학의 대두라는 한국 문학사의 한 변환기에 시작된 이용악의 문학 활동은 동시대의 문학적 추세를 폭넓게 수렴하면서도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파시즘화와 신민 체제의 재편성에 따른 황폐한 현실과 그 공간에 처한 보통인들의 고통스런 삶을 깊이 인식하고 그것을 시로 형상화한 사실은 우리 시문학사에서 높게 평가할 만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단, 친일 시를 제외한다면.
추천할 만한 텍스트
『이용악 시 전집』, 이용악 지음, 창작과비평사, 1998.
『낡은 집』, 이용악 지음, 미래사, 2003.
[네이버 지식백과] 이용악의 시 - 암울한 시대의 방랑자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2006. 9. 18.,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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