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바라기 노리코

밤의 정원

공산(功山) 2025. 1. 12. 21:26

   밤의 정원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 1926~2006)

 

 

   향이, 흘러들어

   비로소 알아차린다

   꽃들이 피기 시작한 것을

   정원에 한 그루 금목서金木犀

 

   알알이 맺힌 꽃은

   크림색에서 울금색으로

   금방 색깔을 바꾸고

   아낌없이 요염한 향기를 내뿜는다

 

   멍한 데가 있었던 당신은

   헤어 토닉과 쉐이빙 로션을

   자주 혼동해서

   바르는 사람이기도 했던지라

 

   밤의 찬공기에 감도는 그윽한 꽃향기에 홀려

   저 세상과 이 세상의 경계

   투명한 가을의 회전문을 밀치고

   불쑥, 이곳에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여름 기모노를 입고

   어라?

   예상치 못했다는 듯

   머리를 쓸어올리면서

 

   이미 알아차렸으면서도

   이쪽은 짐짓 시치미를 떼고

   놀라지 않도록 티 내지 않고

   말을 걸겠지요, 어제가 이어진 것처럼

 

   여보, 어느새

   이렇게 큰 나무가 되어 꽃이 잔뜩 피었네요

   심었을 때는, 대여섯 개의 꽃을 헤아렸을 뿐인데

   봐요, 이렇게 잔뜩 피어서

 

   틈을 보아

   천천히 당신의 허리띠를 꽉 잡고

   함께 휙 공중제비를 돌며

   이번에야말로 함께 가는 겁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자그마한 이 정원 어딘가에

   그런 회전문이 숨겨져 있을 것 같아

   떠나지 못하는, 밤의 정원

 

 

  ―『이바라기 노리코 선집』 다니카와 슌타로 엮음, 조영렬 옮김, AK,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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