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바라기 노리코

발자국

공산(功山) 2025. 1. 12. 15:30

   발자국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 1926~2006)

 

 

   은행이 지는 날

   박물관 유리 너머로 보는 점토에 찍힌 작은 발자국

   길이 4센티미터 가량 되는 유아의 발자국

   아오모리현 롯카쇼 마을에서 출토

   조몬시대 후기

   아이는 으앙 하고 울었을까

   생글생글 웃고 있었을까

   마른 점토판을 알불로 서툴게 태웠어도

   그 부드러움은 생생하니

   옛날 그 옛날의 부모들도

   사랑스런 아이의 발자국을 남기고 싶어했다

   병아리콩 다섯 알이 늘어선 듯한 발가락

   어쩐지, 뭉클하게 젖어드는 눈시울

 

   나한테는 슬픈 일이 있었고

   울다 울다 지쳐

   눈물샘이 얼어붙고

   감정도 다 메말라

   마음이 움직이는 일 따위 모조리 없어져 버렸는데

   자그마한 발이 툭 차주었다

   내 속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을

 

   그건 그렇고

   너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3천년 전의 발자국을

   바로 어제인 것처럼

   남겨두고

 

 

   ―『이바라기 노리코 선집』 다니카와 슌타로 엮음, 조영렬 옮김, AK,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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