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의 시 83

바람아 나를 묻어 다오 - 안나 아흐마또바

바람아 나를 묻어 다오 안나 아흐마또바 바람아 나를 묻어 다오 정든 이 아무도 오지 않고 떠도는 저녁과 대지의 고요한 숨결만 찾아든다. 너처럼 자유로웠던 나 너무도 살고 싶었다. 바람아, 보아라, 아무도 돌볼 이 없는 차디찬 내 육신을. 저녁이 만들어 준 어둠의 옷으로 이 검은 상처를 덮어 다오. 내 위에서 시를 읽어 다오. 푸른 안개를 말해 다오. 마지막 잠이 들 외로운 내 영혼을 위하여, 나의 봄을 위하여, 키다리 사초莎草처럼 울어 다오, 바람아! (1909년) --------------------- *안나 안드레예브나 아흐마또바 :1889-1966 (본명 고렌고) 남러시아의 오데사 근처에서 출생. 러시아의 민족시인.

외국의 시 2016.02.03

백학 (白鶴) - 라술 감자토비치 감자토프

백학 (白鶴) 라술 감자토비치 감자토프 가끔 생각하지, 피로 물든 들녘에서 돌아오지 않는 병사들이 잠시 고향땅에 누워보지도 못하고 백학으로 변해 버린 듯하여 그들은 그 옛적부터 지금까지 날아만 갔어. 그리고 우리를 불렀어 그래서 우리는 자주 슬픔에 잠긴 채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잊는 건 아닐까? 오늘 석양이 저물어 갈 무렵 안개 속의 학들이 마치 땅 위의 사람들이 다리를 끌며 가듯, 대오를 지어 날아가고 있구나 날아가네, 기나긴 여정을 꺼이꺼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혹 그래서 우리 아바르말이 개벽 이래 학의 소리와 닮은 것이 아닐까? 날아가네, 날아가네, 저 하늘에 지친 학의 무리 내 지난 친구들과 혈육들이 무리지은 대오의 그 조그만 틈새, 그 자리가 혹 내 자리는 아닐런지! 그날이 오면 학들과 더불어..

외국의 시 2016.02.03

사모곡思母曲 - 라술 감자토비치 감자토프

사모곡思母曲 라술 감자토비치 감자토프 -첫번째 노래 백학이여, 이미 낯선 땅으로 갔더냐 언제 다시 오려느냐 난 어머니를 여의고 말았단다 이미 흘러간 일, 다시 돌아오시지 못할 어머니를 기러기는 남녘을 떠나는데 서둘지 않았고 봄은 저토록 더디 오는데 어머님만 황망히 길 떠나셨습니다 어머님만 서두셨습니다 풀잎이여, 그 따뜻했던 여름날 젖소들 살찌우려 저 산에 누워있지 않았더냐 저 먼 비탈에도 돋아나, 입혀다오 내 어머니 무덤에 아늑한 푸르름을 언젠가 어머니의 맑은 눈빛이 마주했던 이른 새벽 해돋이 어머니 무덤 맡에 솟아 나거라 이 내 슬픔을 나와 함께 하여 다오! 제 집에 딸년 하나 태어났습니다 막내딸을 얻어 우리 모두는 기쁩니다만 손녀딸조차 기다리지 못함은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렇게 서두셨나요, 어머니…..

외국의 시 2016.02.03

돌 - 오시프 만젤쉬탐

돌 오시프 만젤쉬탐 깊은 숲의 정적의 끊임없는 선율 사이의 나무에서 떨어지는 열매의 조심스럽고 공명한 소리. (1908) --------------------------------- 만젤쉬땀(О. Э. Мандельштам, 1891~1938) : 1913년에 출판된 그의 처녀 시집의 제목은 「돌(камень, 1913)」이다. 만젤쉬땀은 건축에 필요한 벽돌과 돌을 세심하게 고르는 건축가에 자신을 비교하기를 좋아했다. 그의 시는 정확한 언어와 경쾌한 운이 혼합돼 있고, 운율은 잘 어울리며 종종 진지하고 엄숙하다. 만젤쉬땀은 일생동안 일관된 미적 원칙에 몰두했다. “아무런 낱말도 아직 쓰여지지 않으나, 시는 이미 소리를 갖고 있고, 소리의 내적 이미지는 살아서 시인의 귀에 들린다.”라고 말한다. 낱말은 소..

외국의 시 2016.02.03

가을 - 토마스 흄

가을 토마스 흄 가을밤의 싸늘한 감촉 ㅡ 밖으로 나왔더니 얼굴이 붉은 농부처럼 불그레한 달이 울타리 너머로 굽어 보고 있었다 나는 말은 건네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가장자리에는 생각에 잠긴 별들이 도시의 아이들처럼 얼굴이 창백했다 ​ Autumn T. E. Hulme A touch of cold in the Autumn night- I walked abroad. And saw the ruddy moon lean over a hedge Like a red-faced farmer. I did not speak, but nodded, And round about were the wistful stars With white faces like town children. ​----------------------..

외국의 시 2016.01.26

생각 속의 여우 - 테드 휴스

생각 속의 여우 테드 휴스 나는 상상한다, 이 한밤 순간의 숲을. 다른 무엇인가가 살아있다. 시계의 고독 곁에 그리고 내 손가락들이 움직이는 이 백지 곁에. 창문을 통해 나는 아무 별도 볼 수 없다. 어둠 속에서 비록 더 깊지만 더욱 가까운 무엇인가가 고독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어둠 속에 내리는 눈처럼 차고, 살포시, 여우의 코가 건드린다 잔가지를, 잎사귀를. 두 눈이 도와준다, 이제 막 그리고 또 이제 막, 막, 막 나무 사이 눈 속에 또렷한 자국을 찍는다 하나의 움직임, 그리고 빈터를 대담히 가로질러 온 한 형체의 절름거리는 그림자가 그루터기를 지나 움푹 팬 곳에서 꾸물거리고, 하나의 눈(目) 초록 빛이 퍼지고 깊어지고 짙어지면서, 찬란히, 집중적으로, 제 임무를 다하여 마침내 갑작스럽고 날카로운 ..

외국의 시 2016.01.26

그 겨울날의 일요일들 - 로버트 헤이든

그 겨울날의 일요일들 로버트 헤이든 일요일에도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 그 검푸른 추위 속에 옷을 입고는, 한 주 동안 모진 날씨에 일하느라 갈라져 쑤시는 손으로 재 속의 불을 다시 살려 놓았다.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았다. 나는 잠에서 깨어 추위가 빠개지는 소리를 들었다. 방들이 따뜻해지고 나서야 아버지는 부르셨다, 나는 느릿느릿 일어나 옷을 주워 입고, 그 집의 만성적인 노여움이 두려워, 그분에게 건성으로 말을 건네곤 했다, 추위를 몰아내 주고 내 좋은 구두까지 닦아놓으신 아버지에게 말이다. 내가 그때 어찌, 어찌 알았을 것인가? 사랑의 엄숙하고 외로운 사명을, Those Winter Sundays Robert Hayden Sundays too my father got up early and put his..

외국의 시 2016.01.26

은유 - 실비아 플라스​

은유 실비아 플라스​ 나는 아홉개 음절로 이루어진 수수께끼랍니다. 코끼리이고, 육중한 집이며, 두개의 덩굴손으로 이리저리 거니는 멜론이지요. 오 빨간 열매, 상아, 질좋은 목재여! 이 빵은 이스트로 한껏 부풀려져 커졌답니다. 돈은 이 뚱뚱한 지갑안에서 새로 만들어지고 있구요. 나는 도구이며, 무대이며, 새끼를 밴 암소랍니다. 나는 한 자루의 푸른 사과를 먹고, 종착역도 없는 기차를 탔습니다. Metaphors Sylvia Plath I'm a riddle in nine syllables. An elephant, a ponderous house, A melon strolling on two tendrils. O red fruit, ivory, fine timbers! This loaf's big with ..

외국의 시 2016.01.26

호수의 섬 - 에즈라 파운드

호수의 섬 에즈라 파운드 오 신이여, 비너스여, 도둑 떼의 수호신이여, 간청하노니, 내게 주소서. 조그만 담배 가게를, 선반들에 가지런히 쌓여 있는 작고 반짝이는 상자들과 함께, 묶이지 않은 향기로운 씹는 담배와 독한 살담배와 반짝이는 유리 진열장 아래 흩어진 반짝이는 버지니아 담배가 있고, 너무 번들거리지 않은 천칭 저울도 하나쯤 있는, 잠시 머리를 매만지며, 버릇없는 말로 한두 마디 수작을 거는 매춘부들도 있는. 오 신이여, 비너스여, 도둑떼의 수호신이여, 조그만 담배 가게를 빌려 주거나 아니면 다른 일자리라도 주소서, 쉴 새 없이 머리를 써야 하는 이 빌어먹을 글 쓰는 일만 아니라면. ​The Lake Isle Ezra Pound O God, O Venus, O Mercury, patron of t..

외국의 시 2016.01.26

개의 묘비명(Epitaph to a Dog) - 조지 고든 바이런

개의 묘비명(Epitaph to a Dog) 조지 고든 바이런 이곳 가까이에 유해가 묻힌 이는 허영 부리지 않은 아름다움과 오만하지 않은 힘과 잔인하지 않은 용기와 인간의 악덕이 없는 모든 미덕을 갖췄다. 이 찬사가 인간의 잿더미 위에 새겨진다면 의미없는 아첨이 되겠지만, 1803년 5월 뉴펀들랜드에서 태어나 1808년 11월 18일 뉴스테드 애비에서 죽은 개 ‘보우슨’을 추모하여 바치는 것이니 너무나 정당한 찬사이리라. ----------------------------------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en, Lord Byron, 1788-1824) ― 낭만주의 시인의 선두주자로 유명했던 영국의 시인. 신체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조각같은 외모와 방탕한 기질로 유럽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

외국의 시 2016.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