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철

바이칼

공산(空山) 2020. 2. 28. 19:39

   바이칼 

   신대철


   1. 은빛 물빛

   큰 소나무 위에서
   품속으로 돌아온 아이들
   산 능선 걸치고 잠들어가면
   할머니는 먼 곳을 향해 웃으셨습니다.

   잔잔한 할머니 눈가에 잡히던 은빛 물빛
   바람에 눈빛승마에 반짝이던 은빛 물빛

   할머니 돌아가신 뒤에는
   먼 곳으로 번져갔던 웃음이
   숨결을 타고 아내의 눈가로 돌아왔습니다.

   눈 날리고 해 저물고

   아이들이 전자사막에서 헤매다 돌아와도
   아내는 모래와 흙과 먼지에 뒤덮인 채
   먼 곳을 보고 조용히 웃었습니다.
   은빛 물빛 할머니의
   할머니의 머나먼 할머니를 향해


   2. 바이칼에선 누구나 한 영혼?

   숨결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길

   광활한 평원을 가로질러
   숨 부드러워지는 곳에서
   우리는 잠시 길을 멈추었습니다.

   백두대간을 타고 가면 한자리에 잔상으로 스치던 솜다리와 엉겅퀴와 민들레가 길언덕에 한데 어울려 있었습니다. 혼자 있어도 묵묵히 자기 대역을 하며 살아온 노인이 엉겅퀴 옆으로 끼어 들어가 무심히 서 있었습니다. 메마른 땅엔 흰 구름, 흰 구름, 솜털 가시지 않은 처녀들이 바람 따라 들어오다 주춤했습니다.
   작은 구릉 위에서 누군가 바이칼! 바이칼! 하고 소리쳤습니다. 출렁출렁 푸르게 넘쳐오는 소리를 향해 일행들이 고개를 쳐들고 돌아보았습니다. 바이칼이 바로 눈앞에 있었지만 울란우데에서 온 노점상 부리야트 가족도 그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몸속 어딘가에 바이칼 숨결이 흐르고 있었던가요? 바이칼이 우리 영혼의 이름이었던가요? 물살이 스치기만 해도 가슴까지 수심이 차올랐습니다.

   (바이칼,
   우리가 있기 전에 우리가 오고
   우리가 있기 전에 우리가 그리워한 곳
   오래오래 꿈꾸어도
   물결 소리 들리지 않으면
   영혼이 머물 수 없는 곳)

   우리는 허공으로 숨 몰아쉬고
   높은 데로 오르고 오르다가
   수심으로 푸르게 숨쉬면서
   그대 눈으로 알혼 섬*을 보고
   내 눈으로 후지르를 생각하고
   한 영혼이 되어 호수를 건넜습니다.

 

 

   3. 후지르 마을

   부르한 바위 앞에서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모두들 알몸으로 물속에 잠겼습니다.
   오색 물무늬들 어지럽게
   수면을 스치는 순간
   몸속에 들어와 있던 수심이
   조금씩 물살로 풀어졌습니다.
   가슴엔 일렁이는 푸른빛만 남았습니다.

   어린 시절 굴뚝 밑에서
   처음으로 죽음을 느끼고 울고 있을 때
   사람은 누구나 먼 곳에서 왔다가
   다시 먼 곳으로 돌아간다고 하시던 할머니,
   그 먼 곳을 무서워하며 그리워하던 시절부터
   머리 위에 붙어오던 까마귀떼들이
   벼랑 위 자작나무**로 옮겨 앉았습니다.

   흰 자작나무도 우리의 은빛 푸른 영혼?

   바이칼 바람 소리
   높고 은은해지고
   솔숲 우거진 산자락 아래 안 보이던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탯줄 같은 구릉길, 나지막한 분지에 포근히 들어앉은 후지르 마을, 행인 하나 없어도 빨랫줄에 옷가지 흔들리고 판자 울타리 휘어지게 넘어오는 흰 감자꽃들, 언젠가 들은 듯한 자장가 소리에 보얗게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바이칼 호에 있는 섬 중 가장 큰 섬. 섬 주민은 주로 후지르 마을에 모여 사는데, 대부분 부리야트인들이다. 이 섬에는 샤머니즘 성소인 부르한 바위가 있고 우리의 인당수를 상기시키는 설화도 남아 있다.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자작나무는 하늘과 인간을 중재하는 우주목이다. 샤먼이 되려면 하나의 통과의례로 자작나무를 올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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