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철

고리섬

공산(空山) 2015. 12. 24. 15:07

   고리섬
   신대철


   방앗간 탱자나무 울타리 밑으로 불어오던 들바람 소리, 방죽에서 흘러들던 비릿하고 후끈한 물냄새, 개구멍만 남은 동네 뒷문이 열리면서 황황히 들길로 사라지던 쫓기는 발자국 소리, 멀리 따가운 햇볕과 거칠게 흔들리는 보리밭 물결 위로 언뜻 떠오르다 가라앉던 검은 뒷모습, 그날 우리는 탱자를 따다 영문도 모르고 쫓겨갔던가, 비행기 소리 들리고 쫓길수록 달아날수록 앞지르던 공포, 공포, 숨도 고르지 않고 우리는 들 한가운데에 그냥 서 버렸고 느티나무에 올라앉아 사방을 둘러보았던가, 뜸, 뜸, 뜸부기 소리 희미하게 들리면서 봉긋하게 무덤 하나 부풀어 있었고 거기 웬 아저씨가 봉분 아래 깜부기 같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보리 물결이 눈 주름에 깊게 일렁이고 있었다,
   지리산으로 들어간다는 아저씨는 우릴 하나씩 높이 들어올려 너희 세상은 이만큼 높은 세상이라고 말했다, 높은 세상? 아저씨는 우릴 봉분 위에 올려놓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오랑캐꽃과 까치밥풀이 무성한 그 자리에 우리도 앉아 보았다, 그늘 한 자락 없었지만 나무 아래보다 더 깊고 아늑해졌다, 몸에선지 어디선지 멀어질 듯 다가올 듯 스며들던 눈빛, 몸 속에 아른아른 아리게 자리잡던 긴 그림자, 어느새 흔들리는 보릿대 사이로 붉은 해 기울고 사라진 길과 동네 지붕이 슬며시 떠올라 있었다, 보리밭 물결 위에 높은 세상이?

   보리 물결 타고 모두들
   가물가물 흘러가버린 곳에
   들도 없이 번지는
   탱자 향기 노랗게 익어가는 음성,
   영혼이 스쳐갔던 것일까,
   그때 처음으로
   우리와 아저씨를 한 몸으로 세운 영혼이?

   마른 흙바람 속에서
   우리는 듣는다, 한 점 고리섬을 넘어
   백두대간 굽이쳐 올라갈 큰 영혼을

 
 
   ―《시와사람》 2001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