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와바 쉼보르스카 33

생일

생일 쉼보르스카 온 세상이 사방에서 한꺼번에 부스럭대고 있어요. 해바라기, 배따라기, 호루라기, 지푸라기, 찌르레기, 해오라기, 가시고기, 실오라기, 이것들을 어떻게 가지런히 정렬시키고, 어디다 넣어둘까요? 배추, 고추, 상추, 부추, 후추, 대추, 어느 곳에 다 보관할까요? 개구리, 가오리, 메아리, 미나리, 휴우, 감사합니다. 너무 많아 죽을 지경이네요. 오소리, 잠자리, 개나리, 도토리, 돗자리, 고사리, 송사리, 너구리를 넣어둘 항아리는 어디에 있나요? 노루와 머루, 가루와 벼루를 담을 자루는 어디에 있나요? 기러기, 물고기, 산딸기, 갈매기, 뻐꾸기는 어떤 보자기로 싸놓을까요? 하늬바람, 산들바람, 돌개바람, 높새바람은 어디쯤 담아둘까요? 얼룩빼기 황소와 얼룩말은 어디로 데려갈까요? 이런 이산화..

경이로움

경이로움 쉼보르스카 무엇 때문에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한 사람인 걸까요? 나머지 다른 이들 다 제쳐두고 오직 이 사람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요? 수많은 날들 가운데 하필이면 화요일에? 새들의 둥지가 아닌 사람의 집에서? 비늘이 아닌 피부로 숨을 쉬면서? 잎사귀가 아니라 얼굴의 거죽을 덮어쓰고서? 어째서 내 생은 단 한번뿐인 걸까요? 무슨 이유로 바로 여기, 지구에 착륙한 걸까요? 이 작은 혹성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나 여기에 없었던 걸까요? 모든 시간을 가로질러 왜 하필 지금일까요? 모든 수평선을 뛰어넘어 어째서 여기까지 왔을까요? 무엇 때문에 천인(天人)도 아니고, 강장동물도 아니고, 해조류도 아닌 걸까요? 무슨 사연으로 단단한 뼈와 뜨거운 피를 가졌을까요? 나 자신을..

분실물 보관소에서의 연설

분실물 보관소에서의 연설 쉼보르스카 나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는 길에 몇몇 여신을 잃어버렸다. 또한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길에 많은 신들을 놓쳐버렸다. 나의 별 몇 개가 영원히 꺼져버렸다. 하늘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의 섬이 하나 둘,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심지어 어디에 발톱을 놓아두었는지도 통 모르겠다. 누가 내 거죽을 뒤집어쓰고 돌아다니는지, 내 껍데기 안에서 살아 숨쉬는 건 무엇인지. 내가 육지로 기어 나왔을 때, 형제들은 다 죽었고. 단지 내 뼈 가운데 일부만 내 안에서 기념일을 맞고 있다. 나는 허물을 벗고 세상에 나와 부질없이 척추와 다리를 혹사하고 말았다. 그러곤 여러 차례 감각을 상실했다. 오래전에 이 모든 것에 대해 세번째 눈을 감았고, 지느러미를 움직였고, 나뭇가지를 흔들었..

귀환

귀환 쉼보르스카 그가 돌아왔다. 아무 말도 없이.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만은 분명하다. 옷을 입은 채 잠자리에 든다. 담요 아래로 머리를 파묻고. 두 무릎을 끌어당긴다. 나이는 마흔 살 가량,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아니다. 일곱 겹의 살갗 너머 어머니의 뱃속, 어둠의 안식처에서 지금 이 순간, 그는 존재한다. 내일은 은하계 전체를 비행하는 데 필요한 인체의 항상성에 대해 강의할 예정.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조그맣게 몸을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 항상성(恒常性) - 외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체내의 안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경향.

만일의 경우

만일의 경우 쉼보르스카 일어날 수도 있었어. 일어났어야만 했어. 일어났었어,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너무 가까이, 아니면 너무 멀리서, 일어났었어, 너에게, 혹은 너를 제외한 다른 누군가에게. 너는 살아남았지, 맨 처음이었기 때문에. 너는 살아남았지, 제일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혼자였기 때문에. 사람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왼쪽으로 갔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갔기 때문에. 비가 왔기 때문에. 그늘이 드리웠기 때문에. 날씨가 화창했기 때문에. 운 좋게도 거기 숲이 있었어. 운 좋게도 거기 나무가 없었어. 운 좋게도 철로, 갈고리, 대들보, 브레이크, 문설주, 갈림길, 일 밀리미터, 일 초가 있었어. 운 좋게도 지푸라기가 물 위에 떠다니고 있었어. 그렇기 때문에, 왜냐하면,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

애물단지

애물단지 쉼보르스카 그는 행복을 원했었다. 그는 진실을 원했었다. 그는 영원을 원했었다. 자, 그를 봐라! 현실과 꿈을 간신히 구별해낸다. 자신이 누구인지 기까스로 깨닫는다. 어류의 지느러미 같은 손으로 부싯돌을 부딪쳐 힘겹게 봉화(烽火)를 피워 올린다. 쉽사리 증오에 휩싸이는 존재, 공허한 웃음을 터뜨리기에도 미욱한 존재, 눈으론 그저 보기만 하고, 귀로는 그저 듣기만 한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어투는 조건문, 이성을 사용해서 이성을 비난해보지만, 그의 뒤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둔감한 살집 외에도 그의 머릿속은 자유와 박식함, 그리고 존재로 가득 차 있으니 자, 그를 봐라! 눈에 보이는 엄연한 실체이기에 변방의 별빛 가운데 하나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으니. 나름대로 생기 있고, 꽤나 능동적인 그는 쓸..

철새들의 귀환

철새들의 귀환 쉼보르스카 그해 봄, 철새들은 또다시 너무 일찍 돌아왔다. 이성(理性)이여 기뻐하라, 본능 또한 실수를 저지를 수 있음에. 본능이 꾸벅꾸벅 졸며 방심하는 사이, 철새들은 눈 속에 추락하여 어이없이 죽음을 맞는다. 정교한 인후(咽喉)와 예술적인 발톱, 건실한 연골과 진지한 물갈퀴, 심장의 배수구와 창자의 미로, 갈비뼈 사이의 가지런한 통로와 열을 지어 곧게 뻗은 근사한 척추, 공예품 박물관에나 어울릴 듯 멋들어진 깃털, 참을성이 다소 부족해 보이는 부리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게 지극히 황당한 죽음을 맞는다. 이것은 애도의 노래가 아니라, 단지 분노의 표현일 뿐. 눈부시게 깨끗한 순백의 천사, 구약 성서 시편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 땀구멍을 지닌 나는 연(鳶), 공중에서는 한없이 자유롭고 개..

베트남

베트남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여인이여, 그대 이름은 무엇이냐? ― 몰라요.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디 출신인가? ― 몰라요.   왜 땅굴을 팠지? ― 몰라요.   언제부터 여기에 숨어 있었나? ― 몰라요.   왜 내 약지를 물어뜯었느냐? ― 몰라요.   우리가 당신에게 절대로 해로운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아는가? ― 몰라요.    당신은 누구 편이지? ― 몰라요.   지금은 전쟁 중이므로 어느 편이든 선택해야만 한다. ― 몰라요.   당신의 마을은 아직 존재하는가? ― 몰라요.   이 아이들이 당신 아이들인가? ― 네, 맞아요.    ― 『끝과 시작』 문학과지성사(최성은 역), 2007.

인구 조사

인구 조사 쉼보르스카 언젠가 트로이 대제국이 우뚝 서 있던 그 언덕에서 일곱 개의 도시가 발굴되었다. 한 편의 서사시를 노래하려면 도시 하나면 충분치 않을까. 나머지 여섯 개는 필요치 않다. 그것들이 과연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육보격의 시는 완전히 붕괴되어버렸다. 갈라진 틈바구니에서 허구가 아닌 논픽션의 벽돌이 삐죽 튀어나온다. 무성 영화처럼 고요한 침묵 속에서 와르르 벽이 무너져내린다. 대들보가 붕괴되고, 쇠사슬이 끊어진다. 마지막 한 방울의 수분까지 남김 없이 말라버린 녹슨 주전자.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부적, 과수원의 씨앗들, 우주비행사가 달에서 가져온 화석처럼 직접 손으로 만져야만 확인 가능한 두개골들. 태고의 흔적들이 퇴적물처럼 우리 옆에 빼곡히 쌓여간다. 공급 과잉으로 넘쳐날 지경. 무지막..

사진첩

사진첩 쉼보르스카 가족 중에서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한때 일어난 일은 그저 그뿐, 신화로 남겨질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아마도 로미오들은 결핵으로? 어쩌면 줄리엣들은 디프테리아로? 어떤 사람들은 늙어빠진 노년이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아남았다. 눈물로 얼룩진 편지에 답장이 없다는 이유로 이승을 등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지막에는 코에 안경을 걸치고, 장미 꽃다발을 든 평범한 이웃 남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정부의 남편이 갑자기 돌아와 고풍스러운 옷장 안에서 질식해 죽는 일도 없다! 구두끈과 만틸라, 스커트의 주름 장식이 사진에 나오는 데 방해가 되는 일도 없다. 아무도 영혼 속에 보스의 지옥을 품고 있지 않다! 아무도 권총을 들고 정원으로 나가진 않는다! (어떤 이들은 두개골에 총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