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와바 쉼보르스카 33

선택의 가능성

선택의 가능성 쉼보르스카 영화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 인간을 좋아하는 자신보다 인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더 좋아한다. 실이 꿰어진 바늘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한다.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모든 잘못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예외적인 것들을 더 좋아한다. 집을 일찍 나서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의사들과 병이 아닌 다른 일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줄무늬의 오래된 도안을 더 좋아한다.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 명확하지 않은 기념일에 집착하는 것보다 하루하루를 기념일처럼 소중히 챙기는 것을 더 좋..

20세기의 마지막 문턱에서

20세기의 마지막 문턱에서 쉼보르스카 우리의 20세기는 이전의 다른 세기들보다 훨씬 더 발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입증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모든 연도에 일련번호가 매겨졌다. 흔들리는 걸음걸이, 숨가뿐 호흡.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들이 이미 너무도 많이 일어났다. 또한 기대했던 수많은 일들이 발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20세기는 행복을 향해서, 따뜻한 봄을 향해서 전진할 예정이었다. 공포는 골짜기 너머, 산 너머, 멀리멀리 내동댕이칠 예정이었다. 진실은 거짓보다 한발 앞서 목표 지점에 도달할 예정이었다. 예기치 못했던 몇 가지 비극이 우리를 엄습했다. 전쟁과 굶주림, 그와 유사한 다른 여러 재앙들…… 무방비 상태의 무력한 사람들을 존중할 예정이었다. 타인에 대한 신뢰, 혹은 그에..

히틀러의 첫번째 사진

히틀러의 첫번째 사진 쉼보르스카 앙증맞은 유아복을 입은 요 갓난아이는 과연 누구? 히틀러 부부의 아들, 꼬맹이 아돌프. 법학 박사가 될까나, 아니면 비엔나 오페라의 테너 가수가 될까나? 요건 누구의 고사리 손? 요 귀와 눈, 코의 임자는 누구? 우유를 먹여 빵빵해진 이 조그만 배는 또 누구 거지? 아직은 알 수 없네. 인쇄공인지, 의사인지, 점원인지, 신부님인지. 요 우스꽝스런 조그만 발이 결국엔 어디로 향할까나, 과연 어느 곳으로? 정원으로, 학교로, 사무실로, 아니면 시장 딸과 결혼하기 위해 결혼식장으로 가려나? 아기 천사, 금지옥엽, 재롱둥이, 애물단지, 일 년 전 그가 세상에 나왔을 때 하늘과 땅에는 온갖 징조 가득했지. 봄의 햇살, 창틀에 핀 제라늄, 뜰에서 들려오던 아코디언 소리, 분홍빛 종이..

유토피아

유토피아 쉼보르스카 모든 것이 명백하게 설명되어 있는 섬. 이곳에서는 탄탄한 증거의 토대를 딛고 서 있을 수 있다. 모든 길은 목적지를 향해 뻗어 있다. 덤불은 정답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 이곳에는 혼돈에서 영원히 해방된 나뭇가지로 뒤덮인 '논리적인 가설의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우물가에는 곧고 탄탄한 '이해의 나무'가 "옳아! 이제 알겠어!"를 연방 외치는 중. 그 안쪽으로 '명백한 타당성의 계곡'이 드넓게 펼쳐진 푸른 숲이 있다. 일말의 의구심이라도 싹트기 시작하면 바람이 불어와 사방으로 흩어놓는다. 메아리는 부르는 사람 없어도 저절로 응답하면서 세상의 비밀에 대해 기꺼이 속삭인다. 오른쪽에는 '의미'가 보관된 동굴. 왼쪽에는 '심오한 깨달음'의 호수. 바닥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온 '진실'이 ..

양파

양파   쉼보르스카     양파는 뭔가 다르다.   양파에겐 '속'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   양파다움에 가장 충실한,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완전한 양파 그 자체이다.   껍질에서부터 뿌리 구석구석까지   속속들이 순수하게 양파스럽다.   그러므로 양파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스스로의 내면을 용감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다.    우리는 피부 속 어딘가에   감히 끄집어낼 수 없는 야생 구역을 감추고 있다,   우리의 내부, 저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지옥,   저주받은 해부의 공간을.    하지만 양파 안에는 오직 양파만 있을 뿐   비비꼬인 내장 따윈 찾아볼 수 없다.   양파는 언제나 한결같다.   안으로 들어가도 늘 그대로다.    겉과 속이 항상 일치하는 존재.   성공적인 피조물이다.   한..

언니에 대한 칭찬의 말

언니에 대한 칭찬의 말 쉼보르스카 우리 언니는 시를 쓰지 않는다. 아마 갑자기 시를 쓰기 시작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시를 쓰지 않았던 엄마를 닮아, 역시 시를 쓰지 않았던 아빠를 닮아 시를 쓰지 않는 언니의 지붕 아래서 나는 안도를 느낀다. 언니의 남편은 시를 쓰느니 차라리 죽는 편을 택할 것이다. 제아무리 그 시가 '아무개의 작품'이라고 그럴듯하게 불린다 해도 우리 친척들 중에 시 쓰기에 종사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언니의 서랍에는 오래된 시도 없고, 언니의 가방에는 새로 쓴 시도 없다. 언니가 나를 점심 식사에 초대해도 시를 읽어주기 위해 마련한 자리는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녀가 끓인 수프는 특별한 사전 준비 없이도 그럴싸하다. 그녀가 마시는 커피는 절대로 원고지 위에 ..

위에서 내려다본 장면

위에서 내려다본 장면   쉼보르스카     시골 길에 죽은 딱정벌레 한 마리가 쓰러져 있다.   세 쌍의 다리를 배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은 채.   죽음의 혼란 대신 청결과 질서를 유지하면서.   이 광경이 내포하는 위험도는 지극히 적당한 수준,   갯보리와 박하 사이의 지정된 구역을 정확히 준수하고 있다.   슬픔이 끼어들 여지는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다.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푸르다.    우리의 평화를 유지시켜주기 위해,   동물들은 정말로 죽는 것이 아니라 표면적으로만 숨을 거둔다.   우리들이 믿고 싶어 하는 대로, 감각이나 이승에 대한 미련을 훌훌 떨쳐버린 채,   우리들이 짐작한 대로, 저승보다는 덜 비극적인 이 세상을 홀연히 떠난다.   그들의 온순한 영혼은 절대로 어둠 속에서 우리를 ..

시편(詩篇)

시편(詩篇) 쉼보르스카 오, 인간이 만들어낸 국경선은 얼마나 부실하고, 견고하지 못한지요! 얼마나 많은 구름이 그 위로 아무런 제약 없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사막의 모래 알갱이들이 한 나라에서 또 다른 나라로 흩날리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산속의 조약돌들이 생기 있게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낯선 토양을 향해 굴러가고 있는지. 열을 지어 나르거나 혹은 국경선의 바리케이드 위에 내려앉은 새들의 이름을 여기서 내가 굳이 일일이 언급할 필요가 있나요? 뭐, 그냥 평범한 참새라고 칩시다 ― 그 참새의 꼬리는 이미 이웃 나라에 속해 있겠죠. 부리는 아직 이쪽을 향하고 있지만. 게다가 가만 있지 않고, 몸을 까딱까딱 흔들고 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무수히 많은 벌레들 중에 개미 한 마리를 예로 듭시다. ..

거대한 숫자

거대한 숫자 쉼보르스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60억의 사람들. 내 상상력은 늘 그랬듯이 언제나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다. 거대한 숫자는 감당하지 못하고, 사소하고, 개별적인 것에 감동을 느낀다. 어둠 속에서 손전등 불빛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가장 앞줄에 서 있는 얼굴들만 닥치는 대로 비추곤 한다. 그럴 때 뒷줄에 있는 나머지 얼굴들은 모조리 생략되고 만다. 기억 속에서도, 회한 속에서도 그들은 영원 속으로 도태되고 만다. 저 위대한 단테조차도 그들의 소멸을 멈출 순 없다. 모든 뮤즈가 함께 어울려 내게 끊임없이 영감을 불어넣는다 해도 존재를 상실한 그들을 위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으랴. Non omnis moriar ― 시기상조에 불과한 근심 걱정. 정녕 내가 온전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것으로 충..

작은 별 아래서

작은 별 아래서 쉼보르스카 우연이여, 너를 필연이라 명명한 데 대해 사과하노라. 필연이여, 혹시라도 내가 뭔가를 혼동했다면, 사과하노라. 행운이여, 내가 그대를 당연한 권리처럼 받아들여도, 너무 노여워 말라. 고인들이여, 내 기억 속에서 당신들의 존재가 점차 희미해진데도, 너그러이 이해해달라. 시간이여, 매 순간, 세상의 수많은 사물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데 대해 뉘우치노라. 지나간 옛사랑이여, 새로운 사랑을 첫사랑으로 착각한 점 뉘우치노라.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여, 태연하게 집으로 꽃을 사 들고 가는 나를 부디 용서하라. 벌어진 상처여, 손가락으로 쑤셔서 고통을 확인하는 나를 제발 용서하라. 지옥의 변방에서 비명을 지르는 이들이여, 이렇게 한가하게 미뉴에트 CD나 듣고 있어 정말 미안하구나.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