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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에서 본 거리 - 김지혜

이층에서 본 거리 김지혜 모시 반바지를 걸쳐 입은 금은방 김씨가 도로 위로 호스질을 하고 있다. 아지랑이가 김씨의 장딴지를 거웃처럼 감아 오르며 일렁인다. 호스의 괄약근을 밀어내며 투둑 투둑 흩뿌려지는 幻의 알약들 아 아 숨이 막혀, 미칠 것만 같아 뻐끔뻐끔 아스팔트가 더운 입김을 토하며 몸을 뒤튼다. 장딴지를 감아 올린 거웃이 빳빳하게 일어서며 일제히 용두질을 시작한다. 한바탕 대로와 아지랑이의 질펀한 정사가 치러진다. 금은방 김씨가 잠시 호스질을 멈추고 이마에 손을 가져가 짚는다. 아 아 정말 살인적이군, 살인적이야 금은방 안, 정오를 가리키는 뻐꾸기 시계의 추가 축 늘어져 있다.

내가 읽은 시 2015.12.21

은발(Silver Threads among the Gold) - 은희(미국민요)

은발    젊은 날의 추억들은 한갓 헛된 꿈이랴   윤기 흐르던 머리 이제 자취 없어라   오 내 사랑하는 님, 내 님, 그대 사랑 변찮아   지난날을 더듬어 은발 내게 남으리   루루루루루루루 뚜루루루루루루     Silver Threads among the Gold    Darling, I am growing old,   Silver threads among the gold,   Shine upon my brow today,   Life is fading fast away.   But, my darling, you will be,   Always young and fair to me,   Yes, my darling, you will be   Always young and fair to me.    ..

트럼펫 악보 2015.12.18

굽은 나무가 더 좋은 이유 - 구광렬

굽은 나무가 더 좋은 이유 구광렬 내가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를 더 좋아하는 이유는 곡선이 직선보다 더 아름답기도 하지만 굽었다는 것은 높은 곳만 바라보지 않고 낮은 것을 살폈다는 증표이기 때문이다. 내가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를 더 좋아하는 이유는 곡선이 직선보다 더 부드럽기도 하지만 굽었다는 것은 더 사랑하고 더 열심히 살았다는 증표이기 때문이다. 땅 위에 뿌리를 두고 하늘을 기다리는 일이 어째 쉬운 일일까 비틀대며 살다보면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의 가치를 알게 되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땅 두 번 살피다 보면 굽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굽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계간《시와시와》가을호

내가 읽은 시 2015.12.18

여우난곬族

여우난곬族 백석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적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新里 고무 고무의 딸 李女 작은 李女 열여섯에 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土山 고무 고무의 딸 承女 아들 承동이 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洪女 아들 洪동이 작은 洪동이 배나무접을 잘 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

백석 2015.12.13

모닥불

모닥불 백석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짓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백석 2015.12.13

여승

여승 백석 여승은 합장을 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녯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딸은 도라지 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 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사슴」1936. 1. --------------------------- 금덤판 - 금점판. 예전에 주로 수공업적 방식으로 작업하던 금광의 일터. 섶벌 - 토종벌을 이르는 말로 토종벌 중에서도 꿀을 모우기 위해 주로 나가다니는 '일벌'을 가리킴.

백석 2015.12.13

목포

목포 김사인 배는 뜰 수 없다 하고 여관 따뜻한 아랫목에 엎드려 꿈결인 듯 통통배 소리 듣는다. 그 곁으로 끼룩거리며 몰려다닐 갈매기들을 떠올린다. 희고 둥근 배와 붉은 두 발들 그 희고 둥글고 붉은 것들을 뒤에 남기고 햇빛 잘게 부서지는 난바다 쪽 내 졸음의 통통배는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멀어져간다. 옛 애인은 그런데 이 겨울을 잘 건너고 있을까. 묵은 서랍이나 뒤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헐렁한 도꾸리는 입고 희고 둥근 배로 엎드려 테레비를 보다가 붉은 입술 속을 드러낸 채 흰 목을 젖히고 깔깔 웃고 있을지도. 갈매기의 활강처럼 달고 매끄러운 생각들 아내가 알면 혼쭐이 나겠지. 참으려 애쓰다가 끝내 수저를 내려놓고 방문을 탁 닫고 들어갈 게 뻔하지만, 옛날 애인은 잘 있는가 늙어가며 문득 생각키는 ..

김사인 2015.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