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물의 집 - 박제천

공산(空山) 2022. 9. 13. 21:34

물의 집
박제천


빈 방에서 새소리가 도란도란 흘러나온다
들여다보니 백자 주전자에서 퍼져 나오는 은은한 향기
새소리는 간 데 없다
작설차를 우리는 동안
참새 입술 닮은 잎들이 정담을 나누었나
무심히 주전자 안을 들여다보니
물 속에 무슨 소리의 무늬가 설핏 보이는 듯싶다
우듬지 가득 받아든 햇빛,
뿌리가 탱탱하게 빨아올린 땅속 어둠이
서로 섞여들며
물이 하고 싶은 소리, 잎이 하고 싶은 소리를
물무늬 지어 주거니 받거니 하는 중이다
사람 몸 속 어둠을 다 씻어야 해
맑은 기운으로 온몸을 감싸 돌아야 해
그 소리 귀 기울이다보니 참 착하다. 참 맛있다
백자 주전자를 기울여 맛깔 난 소리를
잔에 가득 채우는 이 황홀
나는 오늘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물의 말을,
새소리처럼 맑은 잎들의 말을 배부르게 먹었다


―《문학과 창작》 2006.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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