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인연 - 김해자

공산(空山) 2021. 4. 26. 09:30

   인연

   김해자

 

 

   너덜너덜한 걸레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또 망설인다
   이번에 버려야지, 이번엔 버려야지, 하다
   삶고 말리기를 반복하는 사이
   또 한 살을 먹은 이 물건은 1980년 생
   연한 황금색과 주황빛이 만나 줄을 이루고
   무늬 새기어 제법 그럴싸한 타월로 팔려온 이놈은
   의정부에서 조카 둘 안아주고 닦아주며 잘 살다
   인천 셋방으로 이사 온 이래
   목욕한 딸아이 알몸을 뽀송뽀송 감싸주며
   수천 번 젖고 다시 마르면서
   서울까지 따라와 두 토막 걸레가 되었던
   20년의 생애,
   더럽혀진 채로는 버릴 수 없어
   거덜난 생 위에 비누칠을 하고 또 삶는다
   화염 속에서 어느덧 화엄에 든 물건
   쓰다쓰다 놓아버릴 이 몸뚱이

 

 

     『축제』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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