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의 시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이바라기 노리코

공산(空山) 2019. 2. 25. 22:13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1926~2006)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꽈르릉하고 무너지고

   생각도 못한 곳에서

   파란 하늘 같은 것이 보이곤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내게 다정한 선물을 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몰랐고

   순수한 눈짓만을 남기고 다들 떠나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머리는 텅텅 비었고

   내 마음은 무디어졌으며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이런 엉터리없는 일이 있느냐고

   블라우스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비굴한 거리를 쏘다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넘쳤다

   담배 연기를 처음 마셨을 때처럼 어질어질하면서

   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마구 즐겼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아주 불행했다

   나는 무척 덤벙거렸고

   나는 너무도 쓸쓸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될수록 오래 살기로

   나이 들어서 굉장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루오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내가 가장 예뻤을 때』윤수현 옮김, 스타북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