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시 92

서안나의「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해설 - 박남희

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 서안나 지상에서 남은 일이란 한여름 팔작지붕 홑처마 그늘 따라 옮겨 앉는 일 게으르게 손톱 발톱 깎아 목백일홍 아래 묻어주고 헛담배 피워 먼 산을 조금 어지럽히는 일 햇살에 다친 무량한 풍경 불러들여 입교당 찬 대청마루에 풋잠으로 함께 깃드는 일 담벼락에 어린 흙내 나는 당신을 자주 지우곤 했다 하나와 둘 혹은 다시 하나가 되는 하회의 이치에 닿으면 나는 돌 틈을 맴돌고 당신은 당신으로 흐른다 삼천 권 고서를 쌓아두고 만대루에서 강학(講學)하는 밤 내 몸은 차고 슬픈 뇌옥 나는 나를 달려나갈 수 없다 늙은 정인의 이마가 물빛으로 차고 넘칠 즈음 흰 뼈 몇 개로 나는 절연의 문장 속에서 서늘해질 것이다 목백일홍 꽃잎 강물에 풀어쓰는 새벽의 늦은 전언 당신을 내려놓는 하심(下心..

해설시 2018.02.12

'숲으로 된 성벽' 해설 - 박남희

숲으로 된 성벽                         기형도     저녁 노을이 지면    神들의 商店엔 하나둘 불이 켜지고    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    城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    누구나 寺院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한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城    어느 골동품 商人이 그 숲을 찾아와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    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    그는 그 공터를 떠났다     농부들은 아직도 그 평화로운 城에 살고 있다    물론 그 작은 당나귀들 역시     ㅡ『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

해설시 2018.02.12

지평선 - 위선환

지평선 위선환 삽시간이었다 한 사람이 긴 팔을 내려 덥석 내 발목을 움켜쥐더니 거꾸로 치켜들고는 털털 털었다 부러진 뼈토막들이며 해묵은 살점과 주름살들이며 울컥 되넘어오는 욕지기까지를 깡그리 내쏟았다 센 털 몇 올과 차고 작은 눈물 한 방울도 마저 털고 나서는 그나마 남은 가죽을 맨바닥에 펼쳐 깔더니 쿵! 키 높은 탑신을 들어다 눌러놓았다 그렇게 판판해지고 이렇게 깔려 있는데 뿐인가 하늘이 살몸을 포개고는 한없이 깊숙하게 눌러대는 지경이다 (탑 뿌리에 잘못 걸렸던 하늘의 가랑이를 그 사람이 시침 떼고 함께 눌러둔 것) 잔뜩 힘쓰며 깔려 죽는 노릇이지만 이건, 죽을 만큼 황홀한 장엄(莊嚴)이 아닌가 사지에서 구름이 피고 이마 맡에서 별이 뜬다 ----------- 위선환의 시는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상상력을..

해설시 2018.02.12

밀란쿤데라를 생각함 - 고현정

밀란쿤데라를 생각함 고현정 세계 풍물전이 벌어지고 있는 서점 안에 모형낙타가 탁자 위에 우뚝 서 있다 아무도 들쳐 봐 주지 않는 책들을 풀죽은 그들의 이마를 모형낙타는 측은한 눈빛으로 멈추어 서서는 목에서 가슴까지 곧게 뻗은 털을 휘휘 저으며 둘러보고 있다 권태로운 오후 두 시의 사막을 걷고 있던 나는 네 모습에 빨려들 듯 단숨에 다가간다 카멜색의 길고 부드러운 잔등의 털 네 개의 발과 발톱들, 두 눈은 흙빛 플라스틱이다 먼 길을 걸어 오느라 많이 닳아 있다 튀어나온 코와 그 아래엔 구멍은 뚫려 있지 않고 정교하게 붓으로 모양만 그려져 있다 그러나 네 개의 다리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이 찾는 책의 사막을 단단히 딛고 서 있다 사막을 만들어 냈다는 등에 솟은 두 개의 혹이 눈물겹도록 의연해 보여 ..

해설시 2017.12.10

죽란시사첩 서(竹欄詩社帖 序) - 정약용

죽란시사첩 서(竹欄詩社帖 序) 정약용(1762∼1836) 살구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복숭아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을 때 한 차례 모이고, 서늘한 바람이 나면 서지(西池)에 연꽃 놀이 삼아 한 차례 모이고, 국화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겨울 큰 눈이 왔을 때 한 차례 모이고, 세밑에 분매(盆梅)가 피면 한 차례 모인다.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하여 마시며 시를 읊조릴 수 있도록 한다. 나이 적은 사람부터 먼저 모임을 준비하여 한 차례 돌면 다시 그렇게 하되, 혹 아들을 본 사람이 있으면 모임을 마련하고, 수령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마련하고, 승진한 사람이 있으면 마련하고, 자제 중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있으면 마련한다. ■ 18세기 말 다산 정약용 형제가..

해설시 2017.11.30

다정한 - 김경미

다정한 김경미 오늘따라 기차가 너무 다정해서 바닷가 간이역이 되고 바다로 난 의자가 너무 다정해서 저녁노을이 되고 다정한 불빛 아래 지금까지 본 라일락나무를 다 합친 라일락나무를 보았네 팔 벌려 안아 본 그 큰 다정함 한 뼘도 안 되는 양팔이 너무 다정해서 스웨터가 되듯이 섬과 밤이 하도 다정해서 복숭아 엉덩이가 되듯이 이런 화창함이라니! ■ 나는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 좋다. 똑똑한 사람도 좋고, 용기 있는 사람도 좋고, 솔직히 돈이 좀 많은 사람도 좋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 다정한 사람이 좋다. 아니 다정하지 않으면 여하간 좋아지지가 않는다. 아마 누구든 그럴 것이다. 그런데 '다정하다'란 무슨 뜻일까? 사전을 찾아보면 '정이 많다' 혹은 '부드럽고 친절하다' 정도로 적혀 있다. 사전에 적힌 뜻풀이니 ..

해설시 2017.11.28

안개 - 김참

안개 김참 공중엔 해가 떠 있었고 도로엔 구름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구름이 지나가자 사물들이 조금 사라졌다. 자동차 몇 대가 사라지고 강변 산책로에 늘어선 은행나무 몇 그루 사라졌다. 나무 의자에 앉아 강을 바라보던 연인이 그림자 두 개를 얼룩처럼 남기고 사라졌다. 강변 산책로에 구름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해 지고 어두워지자 강에서 안개가 올라왔다. 안개가 강변 은행나무들을 지워 가는 동안 강변 산책로에 기린들이 출몰했다. 오래전에 사라진 검은 개 몇 마리가 안개 자욱한 사차선 도로를 횡단하고 있었다. 아침이 와도 안개는 끝없이 피어올랐다. 오래전에 사라진 아이들이 검은 개와 함께 안개 속을 뛰어다녔다. ■ 이 시는 일단 기이하다. 세 문장, 즉 "공중엔 해가 떠 있었고 도로엔 구..

해설시 2017.11.28

윤동주 - 김완하

윤동주 김완하 샌프란시스코 부근 라피엣에서 아침에 출발하여 여덟 시간 달려온 곳, 지인의 별장이 있는 엘에이 부근의 피논힐로 가다가 잠시 기름 넣으러 휴게소에 들르고, 점심으로 햄버거 가게에 들러 쉬었다 닿은 곳 한 여름 사막 열기에 지치고 지쳐 흙먼지 길 따라 들어간 가파른 골목, 길 끝나는 지점에 내비게이션도 방향을 잃고 넉 다운 되고 만 곳, 막다른 비탈을 타고 오르자 거기 언덕 위에 외따론 건물, 사방 내려 쬐는 불볕더위에 심신은 시들고 방향 분갈 할 수 없어 차 밖으로 나오니 그곳은 온통 하늘, 바라볼 것은 오직 하늘뿐이었다 숨 막히는 더위 피해 집안으로 급히 들어가 창문을 여니, 사방에서 시원한 바람 몰려들어와 온몸 감싸고 더위에 지친 마음 어루만져 주었다 막막한 사막 한가운데 오직 바람만 살..

해설시 2017.11.20

리산의 「너바나」 감상 - 황인숙

너바나   리산(1966∼)     언덕을 넘어 외곽으로 가는 마지막 전차의 종소리도 그친 자정이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입술을 가진 남자와 세상에 가장 쓸쓸한 손톱을 가진 여자가 모여드는 자정 너머 술집에 불이 켜지지    누군가와 어깨를 겯고 먼 곳에서 먼 곳으로 가고 싶은 한쪽 어깨가 기울어진 남자와 금이 간 청동의 술잔에 제 손금을 비추어 보는 여자가 있는 그곳에는, 유효기간이 지난 달력을 찢어 불이 꺼진 화덕에 불씨를 살리고 밀봉된 병 속의 시간을 헐어 작고 단단한 주전자 가득 끓여내는 뜨겁고 진한 국물이 있지    지금 막 일인분의 따뜻한 음식을 사기 위해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는 남자와 뜨거운 김이 오르는 노점 식당 앞에 서서 청어 향수가 뿌려진 손수건으로 지워지지 않는 이마의 허기를 닦는 ..

해설시 2017.10.05

저녁 팔월 - 유희경

저녁 팔월 유희경 저녁이 비처럼 쏟아지면 나는 발꿈치를 들고 거실로 간다 온전한 소파에는 아무 일도 없음이 모든 일들과 나란히 앉아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물병을 꺼내고 컵에 물을 따르다 말고 잠시 부엌 만 한 슬픔을 맞이하기도 한다 나는 당신을 부른다 당신은 없고 그러니 대답도 없고 창문을 열거나 문밖을 나선다 해도 젖은 나무 젖은 간판과 가게들 그 안에서 젖어가는 사람들 젖은 고양이가 살펴보는 젖은 쓰레기 온통 젖었으며 젖어가는 것들로만 가득한 거리를 보게 될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니 나는 침묵을 차곡차곡 열 지어 개놓듯 옷을 벗는다 하나씩 옷을 벗고 벗어 더 벗을 것이 없어질 때까지 벗게 되는 그런 저녁에 나는 조용한 구석이 되어 곁을 지우고 아무도 필요 없는 밤을 맞이하는 것이다 ㅡ「..

해설시 2017.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