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쿤데라를 생각함
고현정
세계 풍물전이 벌어지고 있는 서점 안에
모형낙타가 탁자 위에 우뚝 서 있다
아무도 들쳐 봐 주지 않는 책들을 풀죽은
그들의 이마를 모형낙타는 측은한 눈빛으로
멈추어 서서는 목에서 가슴까지 곧게 뻗은 털을
휘휘 저으며 둘러보고 있다
권태로운 오후 두 시의 사막을 걷고 있던 나는
네 모습에 빨려들 듯 단숨에 다가간다
카멜색의 길고 부드러운 잔등의 털
네 개의 발과 발톱들, 두 눈은 흙빛 플라스틱이다
먼 길을 걸어 오느라 많이 닳아 있다
튀어나온 코와 그 아래엔 구멍은 뚫려 있지 않고
정교하게 붓으로 모양만 그려져 있다
그러나 네 개의 다리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이 찾는 책의 사막을 단단히 딛고 서 있다
사막을 만들어 냈다는 등에 솟은 두 개의 혹이 눈물겹도록
의연해 보여 나는 두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어본다
오후 두 시의 도시 사막을 혼자 타박타박 걷고 있는
모형낙타의 메마른 슬픔이 내 손바닥의 무수한 잔금들을 통해
전달되어 심장을 쿵쿵 울려대기 시작한다.
♣ 제목이 시의 내용확장을 불러온 대표적인 시다. 고저장단이 잘 배합된 시라고 보여진다. 즉 내용은 현상적인데 반해 제목은 관념적이다. 만약 이 시의 제목이 [모형낙타를 보며] 정도로 제시되었다면 시의 내용확장은 상당히 축소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형낙타의 설정이 인상적인 이 시는 시적화자인 '나'와 낙타가 동일화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오후 두시의 도시 사막을 혼자 타박타박 걷고 있는 모형낙타의 메마른 슬픔"(18~19행) ----불모의 사막과 같은 현실을 지켜나가는 시인의 운명을 읽을 수 있다. "모형낙타의 메마른 슬픔이 내 손바닥의 무수한 잔금들을 통해 전달되어 심장을 쿵쿵 울려대기 시작한다."(마지막 행) ----낙타의 슬픔이 나에게 완전히 동화됨으로써 시인이 낙타가 됐다. 시인이 파악한 현실이란, 쿤데라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견딜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으로 가득하겠다. 이 작품의 모형낙타는 쿤데라의 첫 작품 [사랑]처럼 메마른 현실에 온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존재를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를 쓰는 과정이란 결국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며 유한한 존재의 무기력과 소외를 견뎌내는 과정이라는 것일까? 따라서 이작품의 모형낙타는 시인일 수도, 독자일 수도 있겠다. ■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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