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시 96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감상 - 김선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 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이 시는 바야흐로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고 싶은 시인의 고백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짜 연애편지다. 어느 밤..

해설시 2020.05.15

마종기의 '바람의 말' - 나민애

바람의 말 마종기(1939~ )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 날아가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말’은 우리를 살리고 죽인다. 사람은 말을 통해 법과 사회를 배운다. 거대한 문명을 기억하고 전수하는 것도 말을 통한다. 백 년도 못 ..

해설시 2020.05.14

박태현의 「해」- 서범석

해 박태현 검은 보자기에 아버지가 괭이로 구멍을 내시자 풀려난 새들이 산 너머에 있는 해를 물어다 놓았다 어머니는 그 해를 들판에 호미로 온종일 숨기셨다 그러나 아이들은, 숨겨놓은 그 해를 연필로 찾아내어 한 조각도 남김없이 뜯어먹고 있었다 더 검은 보자기에 싸이는 줄도 모르고 뜯어먹고 있었다 ―『한국동서문학』, 2018 여름. 시는 본질적으로 짧은 형식으로 그려진다. 「해」도 그렇다. 불과 5행. 그러나 1행1연으로 처리함으로써 행 사이마다 빈 줄이 자리를 잡았다. 그것은 생각하면서 천천히 읽으라는 시인의 보이지 않는 요구이며, 하루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천천히 이동했음을 독자에게 암시하고 있는 장치이다. 그렇다. 시는 짧은 형식 속에 암시적 형상화를 통해 언어미를 직조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

해설시 2020.05.05

임재정의 「양파, 프랑스 혁명사」 해설 - 김효선

양파, 프랑스 혁명사 임재정 겨울엔 〈프랑스 혁명사〉를 읽지, 얼음이 키들대는 갈피마다 그때마다 가벼워서 무거운 눈이 내려 창틀 유리컵 속 양파 뿌리가 유리창 가득 벌기도 하지 그래, 책갈피에 침이나 묻히며 겨울은 창밖을 엿보는 양파를 위해 입김을 불고 물을 받는 게 전부라서 좋아 어디서 온 바람인지 몰라 수시로 창문이 반응하지만 바람을 핑계로 담요를 덮고 키들거리며 퇴행을 해도 그만 그러나 출근을 하듯 정장을 하고 가끔 목마른 양파와 함께 냉장고까지 산책을 간다네 먼지 쌓인 구두 근처에서 잦아드는 길의 냄새, 아우성 순백의 눈처럼, 금세 더러워지기도 하는 혁명을 양파야 보았니? 창밖을 가혹한 겨울을 이파리가 솟아오른 만큼 양파는 쭈글쭈글해지고 누구든 밑동에 어떤 가려운 뿌리가 접 붙어 있대 끝끝내 유머..

해설시 2020.05.02

백무산의 「정지의 힘」 감상 - 문태준

정지의 힘 백무산 (1955~ )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 백무산 시인의 시 ‘낙화’에는 이런 시구가 나온다. “우리 몸에 낙화의 시간이 지워졌다/ 별이 뜨는 낙화의 시간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정지의 감각이다.” 시인은 전력 공급이 수월하지 않은 나라에서 정전을 경험하면서 전력이 뚝 끊어진 그 시간 동안을 ‘낙화’라고 표현..

해설시 2020.04.26

박세미의 「뒤로 걷는 사람」 평설 - 김동원

뒤로 걷는 사람 박세미 그에게 세상은 한 발자국씩 넓어지는 것이었다 한 발자국씩 멀어지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가 걸을 때 옆에서 커다란 사과나무 한 그루가 나타난다 한 발자국, 사과나무는 불타며 두 발자국, 사과나무는 검게 식으며 세 발자국, 사과나무는 썩은 사과 한 알이 되며 네 발자국, 깜박이는 눈꺼풀 사이로 사라진다 더러 썩은 사과 한 알이 눈에 맴돌 때면 눈을 감고 이리저리 굴려 녹여 없앴다 그는 최소화된 것들과의 이별에 익숙했다 눈이 오던 어느 날 멀리서 그를 향해 달려오는 점이 있었다 그가 한 발자국씩 뒤로 갈 때마다 점은 세 발자국씩 앞으로 다가오며 커지더니 다리를 뻗고 손을 흔들며 마침내 웃어 보였다 달려오던 점은 그의 코앞에서 최대화가 되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을 안아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해설시 2020.03.23

쉼보르스카의 「사진첩」 해설 - 권순진

사진첩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 가족 중에서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한때 일어난 일은 그저 그뿐, 신화로 남겨질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로미오는 결핵으로 사망했고, 줄리엣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늙어빠진 노년이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아남았다. 눈물로 얼룩진 편지에 답장이 없다는 이유로 이승을 등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지막에는 코에 안경을 걸치고, 장미 꽃다발을 든 평범한 이웃 남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정부의 남편이 갑자기 돌아와 고풍스러운 옷장 안에서 질식해 죽는 일도 없다! 구두끈과 만틸라, 스커트의 주름 장식이 사진에 나오는 데 방해가 되는 일도 없다. 아무도 영혼 속에 보스의 지옥을 품고 있지 않다! 아무도 권총을 들고 정원으로 나가진 않는다..

해설시 2019.12.20

문인수의 '얼룩말 가죽' 해설 - 권순진

얼룩말 가죽 문인수 법원 앞 횡단보도 도색은 늘 새것처럼 엄연하다. 흑, 백, 흑, 백의 무늬가 얼룩말 가죽, 호피 같다. 법이 실감난다. 이걸 깔고 앉으면 치외법권 산적 두목 같을까, 내 마음의 바닥도 때로 느닷없는 뿔처럼 험악한 수괴가 되고 싶다. 나는, 이 거대한 늑골 같은 데를 지날 때마다 법에 덜커덕, 덜거덕 걸리는 느낌이다 인간이 참 제풀에 얼룩덜룩한 것 같다. 저 할머니는 이제 법이란 법 다 졸업한 '무법자'일까. 신호등 빨간 불빛 따위 아랑곳없이 무인지경의 횡단보도에 들어선다. 강 건너듯 골똘하게 6차선 도로를 횡단해 간다. 흑, 백, 흑, 백. 생사의 숱한 기로가 이제 침침하게 미끄럽게 거의 다 지워져 정지선 앞에 선 사람들도 어떤 운전자도 그만 씨익 웃는다. 어려 보이는 한 교통경찰이 ..

해설시 2019.11.15

허은실의 「불귀不歸」평설 - 장이지

불귀(不歸) 허은실 나는 어느 묘비에서 빌려온 이름일까 빈집에서 당신의 외투를 깔고 손 베개 괴고 당신을 보네 진흙이 묻은 당신의 무거운 신발을 꿈에는 또 파랗게 질린 꽃들이 피고 흐느낌이 몸 밖으로 흘러 당신은 잠에서 깨네 날으는 새처럼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낯선 어둠을 보네 울 수 없어 노래하는 밤이었네 금 간 술잔 깨진 자리에 혀를 대어 보네 당신은 모래도시 이방의 거리에서 音처럼 태어나 音으로 사라지는 연 없음의 연으로 우리 또다시 정처 없을 것이나 빈 봄에 목련이 피면 당신은 몰래 울겠지 새를 묻은 자리에 새가 날아오면 --------------------------- 허수경의 죽음은 우리를 쓸쓸하게 한다. 허은실의 「불귀」는 그 조시(弔詩)의 성격을 띠고 있다. ‘시인의 말’에 허수경의 죽..

해설시 2019.03.03

최영미의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 권순진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최영미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창자를 뒤집어 보여줘야 하나, 나도 너처럼 썩었다고 적당히 시커멓고 적당히 순결하다고 버티어온 세월의 굽이만큼 마디마디 꼬여 있다고 그러나 심장 한귀퉁이는 제법 시퍼렇게 뛰고 있다고 동맥에서 흐르는 피만큼은 세상모르게 깨끗하다고 은근히 힘을 줘서 이야기해야 하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나도 충분히 부끄러워 할 줄 안다고 그때마다 믿어달라고, 네 손을 내 가슴에 얹어줘야 하나 내게 일어난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두 팔과 두 다리는 악마처럼 튼튼하다고 그처럼 여러번 곱씹은 치욕과, 치욕 뒤의 입가심 같은 위로와 자위끝의 허망한 한 모금 니코틴의 깊은 맛을 어떻게 너에게 말해야 하나 양치질할 때마다 곰삭은 가래를 뱉어낸다고..

해설시 2019.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