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시

저녁 팔월 - 유희경

공산(空山) 2017. 10. 5. 23:06

   저녁 팔월

   유희경

 

 

   저녁이 비처럼 쏟아지면 나는 발꿈치를 들고 거실로 간다 온전한 소파에는 아무 일도 없음이 모든 일들과 나란히 앉아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물병을 꺼내고 컵에 물을 따르다 말고 잠시 부엌 만 한 슬픔을 맞이하기도 한다 나는 당신을 부른다 당신은 없고 그러니 대답도 없고 창문을 열거나 문밖을 나선다 해도 젖은 나무 젖은 간판과 가게들 그 안에서 젖어가는 사람들 젖은 고양이가 살펴보는 젖은 쓰레기 온통 젖었으며 젖어가는 것들로만 가득한 거리를 보게 될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니 나는 침묵을 차곡차곡 열 지어 개놓듯 옷을 벗는다 하나씩 옷을 벗고 벗어 더 벗을 것이 없어질 때까지 벗게 되는 그런 저녁에 나는 조용한 구석이 되어 곁을 지우고 아무도 필요 없는 밤을 맞이하는 것이다

 

   ㅡ「문학사상, 20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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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곁에 아무도 없는 여름 저녁을 형상화한 시다. 비 오는 날이면 저녁은 더 빨리 오고 그 저녁은 정서적으로 우리를 젖음속에 가둔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음이 모든 일들과 나란히 앉아서정적 자아와 함께한다.

   조용하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하다. 슬픔이 잠시 찾아오기도 한다. 부르는 당신은 이곳에 없다. 밖은 젖은 기운이 가득할 것이다. 그래서 집 안에서 침묵의 시간을 쌓아가고 있다. 자아는 조용한 구석이 된다. 결과적으로 아무도 필요 없는 밤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 결과적 진술은 모순이다. ‘당신을 부른다면서, 그래 슬프다면서, 아무도 필요 없는 밤이라 말하는 것은 패러독스이고 아이러니다. 누구든지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지독한 외로움이 그렇게 여름밤을 삼키고 있다. 이와 같은 고백적 시니피에는 특별한 것도 아니고 따라서 예술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이 시의 뭔가에 내가 끌리는 것은 외로움이라는 시니피에를 거느리는 시니피앙의 유의적(有意的) 생동감(生動感) 때문일 것이다.

   저녁이 비처럼 쏟아지다, 아무 일도 없음이 모든 일들과 나란히 앉아 있다, 잠시 부엌 만 한 슬픔을 맞는다, 침묵을 차곡차곡 열 지어 개놓듯 옷을 벗는다, 조용한 구석이 되어 곁을 지우다 등은 작가의 세련된 언어발굴능력을 드러내고 있다. 여름밤의 별들처럼 반짝이는 저 광부의 침묵과 슬픔의 변주가 데려오는 고독의 깊이라니!(서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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