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
쉼보르스카
양파는 뭔가 다르다.
양파에겐 '속'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
양파다움에 가장 충실한,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완전한 양파 그 자체이다.
껍질에서부터 뿌리 구석구석까지
속속들이 순수하게 양파스럽다.
그러므로 양파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스스로의 내면을 용감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다.
우리는 피부 속 어딘가에
감히 끄집어낼 수 없는 야생 구역을 감추고 있다,
우리의 내부, 저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지옥,
저주받은 해부의 공간을.
하지만 양파 안에는 오직 양파만 있을 뿐
비비꼬인 내장 따윈 찾아볼 수 없다.
양파는 언제나 한결같다.
안으로 들어가도 늘 그대로다.
겉과 속이 항상 일치하는 존재.
성공적인 피조물이다.
한 꺼풀, 한 꺼풀 벗길 때마다
좀더 작아진 똑같은 얼굴이 나타날 뿐.
세번째도 양파, 네번째도 양파,
차례차례 허물을 벗어도 일관성은 유지된다.
중심을 향해 전개되는 구심성(求心性)의 아름다운 푸가.
메아리는 화성(和聲) 안에서 절묘하게 포개어졌다.
내가 아는 양파는
세상에서 가장 보기 좋은 둥근 배.
영광스러운 후광을
제 스스로 온몸에 칭칭 두르고 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건 지방과 정맥과 신경과
점액과, 그리고 은밀한 속성뿐이다.
양파가 가진 저 완전무결한 우둔함과 무지함은
우리에겐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 『끝과 시작』 문학과지성사(최성은 역),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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