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여기

공산(空山) 2017. 2. 4. 12:58

   여기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다른 곳은 어떤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여기 지구에서는 모든 것이 꽤나 풍요로워.

   여기서 사람들은 의자와 슬픔을 제조하지.

   가위, 바이올린, 자상함, 트랜지스터, , 농담, 찻잔 들을.

 

   어쩌면 다른 곳에서는 모든 게 더욱 풍족할 수도 있어.

   단지 어떤 사연에 의해 그림이 부족하고

   브라운관과 피에로기*, 눈물을 닦는 손수건이 모자랄 뿐.

 

   여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장소와 그 주변 지역들이 있어.

   그중 어떤 곳은 네가 특별히 좋아해서

   거기에 고유한 이름을 붙이고,

   위해(危害)로부터 그곳을 지켜내고 있는지도 몰라.

   어쩌면 다른 곳에도 여기와 비슷한 장소가 있지 않을까,

   단지 거기서는 아무도 그곳을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을 뿐.

 

   어쩌면 다른 어느 곳과도 달리, 혹은 거의 대부분의 여느 곳과는 달리

   여기서는 네게 자신만의 토르소가 허용 되었는지도 몰라.

   필요한 부속품들을 정착한 채로,

   네 아이들을 다른 아이들 무리에 포함 시킬 수 있게 말이야.

   팔과 다리, 경탄을 금치 못하는 머리는 말할 것도 없고.

 

   여기서 무지(無知)는 과로로 뻗어버렸어,

   끊임없이 뭔가를 계산하고, 비교하고, 측정하면서

   결론과 근본적 원리를 추출해내느라.

 

   그래, 알고 있어,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기서 지속적인 건 아무 것도 없어,

   태곳적부터 지금까지 원소들의 지배 아래 있었으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봐 원소들은 쉽게 지치거든,

   그리고 다시 시동을 걸 때까지

   가끔은 한참 동안 쉬어야 해.

 

   그래, 알고 있어, 네가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쟁, 전쟁, 전쟁,

   하지만 그 사이에는 늘 휴지기(休止期)가 있게 마련이지.

   주목! 사람들은 악해.

   쉬어! 사람들은 선해.

   주목하는 동안 황무지가 만들어지고,

   쉬는 동안 피땀 흘려 집들이 지어져.

   그리고 사람들은 그곳에 재빨리 정착하지.

 

   이 땅 위에서의 삶은 꽤나 저렴해.

   예를 들어 넌 꿈을 꾸는 데 한 푼도 지불하지 않지.

   환상의 경우는 잃고 난 뒤에야 비로소 대가를 치르고,

   육신을 소유하는 건 육신의 노화로 갚아나가고 있어.

 

   그것만으로는 아직도 부족한지

   너는 표 값도 지불하지 않고, 행성의 회전목마를 탄 채 빙글빙글 돌고 있어.

   그리고 회전목마와 더불어 은하계의 눈보라에 무임승차를 해.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여기 지구에서는 그 무엇도 작은 흔들림조차 허용되지 않아.

 

   가까이 와서 이것 좀 보라고.

   탁자는 본래 있던 그 자리에 정확히 서 있어.

   책상 위에는 본래 있던 그대로 종이가 놓여 있고,

   반쯤 열린 창으로 한 줌의 공기가 스며들어오지.

   벽에 무시무시한 틈바구니 따위는 없어,

   혹시 널 어디론가 날려버릴지도 모를 틈바구니 따위는 말이야.

 

 

   *피에로기 - 만두와 비슷한 폴란드의 전통 요리.

 

   ―「 충분하다문학과지성사(최성은 역), 2016.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에게 던진 질문  (0) 2020.08.10
사슬  (0) 2017.02.04
십대 소녀  (0) 2017.02.04
이혼  (0) 2017.02.04
베르메르(Vermeer)  (0) 2017.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