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시 28

오래된 문짝

2022. 2. 26. (토) 촬영 오래된 문짝 김상동 달랑게처럼 세 식구 달랑 살던 초가 허물고 양옥 지을 때 썩은새*, 서까래, 기둥, 문짝들 쌓아 놓고 불태우다가 섭섭해서 문짝 하나만은 남겨 두었네 문고리 잡으면 손이 쩍쩍 얼어붙던 시절, 아랫목 눌은 장판 위엔 익어 가던 술단지, 윗목엔 앉은뱅이책상, 등잔, 재봉틀, 콩나물시루, 휘어진 시렁에 주렁주렁 매달린 메주들과 함께 문풍지 떠는 소리 듣던 방, 머리를 수그려 문 열고 나오면 시리게 다가오던 하늘, 별들은 또 얼마나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반겨 주었던가! 그 문짝 바람벽에 걸어 놓고 바라보고 또 바라보네 부러진 문살은 무명실로 동여맨 곳이 여럿 문고리는 녹슬었지만 마음은 날마다 들락거리네 저 문 열면 닿지 않는 길 없네 엄마 손 잡고 외갓집 가던..

내가 쓴 시 2020.12.16

탱자나무 안테나

탱자나무 안테나 김상동 귀 닫고 눈감고 살 수는 없지 창 너머 탱자나무 한 그루 심어 두고 그를 바라보며 살기로 했네 먼 도시의 저녁노을 그 아래 짐을 나르고 있을 당나귀들 생각 천년 문우가 가리키는 달과 별 쉴 곳 못 찾은 작은 새 다 여기 와서 깃드네 바람 앞에도 햇살 앞에도 사정없는 그의 가시들 이 엄동설한에도 끝내 놓지 않는 언 귓불 같은 이파리 몇 장 그 푸른 안테나가 있어서 나는 쓸쓸해지지 않는다네 ― 『텃밭시학』5집(2017. 가을)

내가 쓴 시 2020.08.01

깡통밭 약사略史

깡통밭 약사略史 김상동 옛적, 천지에 말이라곤 없던 화산 자락 돌밭에 봄이 와서 달래 같은 말, 쑥 같은 말들 여기저기 자라기 시작하고 가을이 와서 귀뚜라미가 통역을 시작한 이래 한 시절 하늘을 덮던 억새들의 수런거림이 제풀에 스러지고 비틀고 올라타기만 하는 칡덩굴이 비탈을 뒤덮을 때도 그 칡밭이 다시 아카시아 숲으로 일어나도 귀뚜라미는 숲속 말들을 받아 노래했네 얼마나 많은 가을이 오고 또 봄이 갔던가 이 골짜기에 송도松濤가 우렁찬 가운데 아아 그 솔밭에 인간이 걸어 다니기 시작하고 길이 생기더니 길가엔 깨진 술병과 타다 남은 비닐봉지에 갇혀 썩어가는 말들, 치미는 부아와 함께 구겨 버려진 신문 활자들, 유체이탈화법의 말을 들려주며 소음을 보태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온갖 헛소문과 욕설과 본말本末이 뒤집..

내가 쓴 시 2020.08.01

그의 탈고

그의 탈고 김상동 현관 앞 내 키만 한 피라칸타 가지가 휘어지도록 붉은 열매를 달고 서 있었다 전화 한 통 할 데 없는 사람같이 눈 내리던 겨울 아침 작은 새 한 마리 날아와 앉곤 하더니 그의 어깨는 가벼워져 갔다 개나리와 벚꽃의 수다가 시끄러운 지금 남겨둔 열매 한 알, 못다 한 말 한 마디 없어 피라칸타는 가슴이 홀가분하다 이제 얼마나 즐거우랴 돌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며 새잎 피우는 일이 다시 시를 써 보는 일이 ― 『대구문학』129호(2017. 11,12월호)

내가 쓴 시 2020.08.01

어머니의 답장

어머니의 답장 김상동 상석 앞에 심어 드린 원추리 꽃 편지에 늦은 답장 보내셨네 어머니 가신 지 여섯 해 소식 깜깜하더니 봉분 앞에 빛나는 낯설고 앙증스런 풀꽃 한 송이 생전에 한글 깨치지 못하시고 아들이 군대에 있을 적엔 이웃 손 빌려 답장하시더니 이제야 풀꽃 편지 법은 터득하셨나 보다 저 풀꽃처럼 환하게 지내시는가 보다 ― 『텃밭시학』 6집, 2018.

내가 쓴 시 2020.07.28

귀거래사

귀거래사歸去來辭* 김상동 5,300만 년 전 저 대왕고래 히말라야 남쪽 풀밭을 뛰어다니던 털북숭이였다지 다시 뭍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 가슴지느러미 속에 남아 있는 손가락뼈 흔적으로만 남은 뒷다리 여전히 튼튼한 허파만을 믿고 오랜 버릇대로 위아래로 등뼈를 흔들어대며 이름마저 희미한 옛 친구들은 어떻게 변한 모습일까? 아직 그곳에 살고 있기나 하는지? 무리지어 오르내리며 나물 뜯고 열매 따던 따사로운 산비탈 밤마다 올라앉아 별을 쳐다보던 너럭바위 지금도 그 자리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데 석별의 정표로 바다 속 친구들이 준 한 다스의 CD와 두툼한 책 한 권 그 너럭바위 위에 앉아 천천히 읽어 보리라 발굽과 털이 다시 돋을 날은 멀기만 한데 34년이란 세월이 3,400만 년 같은데…… *귀거래사歸去來辭 : 중..

내가 쓴 시 2020.07.22

불두화나무

불두화나무 김상동 어머니 홀연히 떠나신 뒤에 알았네 언젠가 함께 서서 가족사진 찍던 돌담 앞 불두화나무에게 당신 목걸이를 걸어 주고 가셨다는 것을 외로움 함께 나눈 고마움의 표시였을까 하나 뿐인 이 아들 사는 모습을 당신 대신 지켜봐 달라는 부탁이었을까 아니다, 어머니는 저 나무가 되신 거다 굽은 등 아담한 키로 서서 야윈 목에 염주 목걸이는 걸고 봄비 맞으며 서 계시는 거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그 무거운 빨랫줄도 이젠 내려놓으시고 잎사귀나 무성하게 틔우세요 꽃숭어리 등燈도 환하게 달아 주시고, ―『문장』39호(2017. 겨울호)

내가 쓴 시 2020.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