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 18

하여간, 어디에선가 - 박승민

하여간, 어디에선가   박승민 (1964~)     안녕,   지구인의 모습으로는 다들 마지막이야   죽은 사람들은 녹거나 흐르거나 새털구름으로 떠오르겠지   그렇다고 이 우주를 영영 떠나는 건 아니야   생각,이라는 것도 아주 없어지진 않아   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건 확실해   보이지 않는 조각들이 모여 ‘내’가 되었듯   다음에는 버섯 지붕 밑의 붉은 기둥이 될 수도 있어   죽는다는 건 다른 것들과 합쳐지는 거야   새로운 형태가 되는 거야   꼭 ‘인간’만 되라는 법이 어디에 있니?   그러고 보니 안녕, 하는 작별은 첫 만남의 인사였네   우리는 ‘그 무엇’과 왈칵 붙어버릴 테니깐   난 우주의 초록빛 파장으로 번지는 게 다음 행선지야

내가 읽은 시 2024.09.29

암끝검은표범나비

암끝검은표범나비는 표범나비 중에서도 암컷의 날개 끝이 검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나비는 종류에 따라 애벌레가 먹는 먹잇감이 다 다른데, 이 나비의 애벌레는 제비꽃 잎만 먹으며 자란다고 한다. 9월 하순인 요즘, 산가에서 내가 관찰해 보니 제비꽃 잎사귀를 찾아다니며 잎의 뒷면에다 알을 낳고 있는 암컷 개체가 자주 눈에 띄었다. 수컷은 그 제비꽃 군락 부근을 날며 배회하다가 다른 수컷이 보이면 근접 비행을 하며 쫓아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비는 아무래도 꽃에 앉아 있을 때가 가장 나비다운 모습이 아니겠는가. 꽃에 앉아 날개를 이따금 접었다 펴기를 하며 꿀을 먹는 일에 열중하는 틈을 타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설경 - 김영태

설경(雪景)   김영태     우리 눈 높이 위에 있는 음악이다   바람이 멎은 후   꽃나무 사이 풍경처럼 삭막한 음악이다   표정만한 가벼운 몸 둘레에 따스한 얼굴   더 소중한 그 무엇을 소망하는 얼굴이다   우리 시야보다 먼데 있는 종소리다   귀를 막고 숨어도 들려오는 종소리다   하여,   이후에 찾아올 몇몇 친구   이미 묘비에 잠든 이   사랑하는 이   모두 한결같이 들려주고 싶은   음악이여   얼굴의 미소여   저 제야의 종소리는 무슨 연유일까   사랑한다는 한 마디의 유언은

내가 읽은 시 2024.09.26

탑동 - 현택훈

탑동 현택훈(1974~ ) 누군 깨진 불빛을 가방에 넣고 누군 젖은 노래를 호주머니에 넣어 여기 방파제에 앉아 있으면 안 돼 십 년도 훌쩍 지나버리거든 그것을 누군 음악이라 부르고 그것을 누군 수평선이라 불러 탑동에선 늘 여름밤 같아 통통거리는 농구공 소리 자전거 바퀴에 묻어 방파제 끝까지 달리면 한 세기가 물빛에 번지는 계절이지 우리가 사는 동안은 여름이잖아 이 열기가 다 식기 전에 말이야 밤마다 한 걸음씩 바다와 가까워진다니까 와, 벌써 노래가 끝났어 신한은행은 언제 옮긴 거야

내가 읽은 시 2024.09.22

서머와인(Summer Wine) - 뚜아에무아, Nancy Sinatra & Lee Hazlewood

썸머와인(번안 가사) 박인희 개사 방울소리 울리는 마차를 타고 콧노래 부르며 님찾아 갔네 하늘엔 흰구름 둥실 떠가고 풀벌레 다정히 우짖는 소리 오오 썸머 와인 따스한 웃음지며 반겨줄 그녀 그리운 고향땅이 저기 보이네 달콤한 포도주를 따라주겠지 입술에 감도는 향기로운 맛 음음 썸머와인 눈부신 태양은 옛과 같지만 그리운 그녀는 간곳이 없네 처량하게 주머니는 텅텅비었고 잊을 길 없어라 달콤한 술 오오 썸머와인 석양을 등에지고 돌아가는 길 쓸쓸한 이내 마음 그 누가 아랴 가슴에 스며드는 갈바람 소리 산새도 목메어 우짖는 마음 음음 썸머와인Summer wine Written by Lee Hazlewood Strawberries, cherries and an angel's kiss in spring My summe..

트럼펫 악보 2024.09.22

이 장미 한 송이

3년 전에 결혼하여 멀리 사는 둘째 아들 부부는 아내와 나의 생일에 축하 케이크나 꽃바구니를 보내 주곤 하였다. 빵을 좋아하는 나는 케이크가 반가웠지만 꽃바구니에 대해선 마냥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 뼘도 안 되는 짧은 길이로 잘려서 물먹은 스펀지(플로럴 폼floral form)에 빽빽이 꽂혀 있는 꽃들을 보면 안쓰럽고 부자연스럽고 답답한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사나흘만 지나면 시들어서 한 보따리의 쓰레기가 돼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들 부부에게 앞으론 꽃바구니 같은 건 보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고 나서 한번은 그 꽃바구니의 장미가 시들기 전에 꽃대가 그중 긴 것 몇 송이를 골라서 꽃은 잘라 버리고 꺾꽂이를 시도해 보았다. 난초 화분에 입자가 고운 적옥토를 채우고, 거기에다 장미 꽃대를..

텃밭 일기 2024.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