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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둥 걷어붙이고 - 송진권

둥둥 걷어붙이고   송진권 (1970~ )     둥둥 걷어붙이고   아부지 논 가운데로 비료를 뿌리며 들어가시네   물 댄 논에 어룽거리는   찔레꽃 무더기 속으로   아부지 솨아 솨르르 비료를 흩으며 들어가시네   소금쟁이 앞서가며 둥그러미를 그리는   고드래미논 가운데로 아부지   찔레꽃잎 뜬 논 가운데   한가마니 쏟아진 별   거기서 자꾸 충그리고 해찰하지 말고   땅개비 개구리 고만 잡고   어여 둥둥 걷어붙이고   들어오라고 아부지 부르시네

내가 읽은 시 2024.07.24

달은 아직 그 달이다 - 이상국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이상국 나 어렸을 적 보름이나 되어 시뻘건 달이 앞산 등성이 어디쯤에 둥실 떠올라 허공 중천에 걸리면 어머니는 야아 야 달이 째지게 걸렸구나 하시고는 했는데, 달이 너무 무거워 하늘의 어딘가가 찢어질 것 같다는 것인지 혹은 당신의 가슴이 미어터지도록 그립게 걸렸다는 말인지 나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나는 이 말을 시로 만들기 위하여 거의 사십여 년이나 애를 썼는데 여기까지밖에 못 왔다. 달은 아직 그 달이다. ―『달은 아직 그 달이다』 2016

내가 읽은 시 2024.07.21

서로 등 돌리고 앉아서 누군가는 빵을 굽고 누군가는 빵을 먹고 - 김륭

서로 등 돌리고 앉아서 누군가는 빵을 굽고 누군가는 빵을 먹고 김륭(1961~ ) 늙었다, 는 문장 위에 앉아 빵을 굽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냄새가 난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이야기여서 누군가는 춥고 누군가는 뜨거울 거야 뒷모습을 취소하고 싶은 사람들이 줄을 선다 그게 누구든 거울을 보면서 할 이야기는 아니어서 우주의 한 구석으로 개미떼처럼 몰린 우리 모두의 기억이 구워낸 빵이다 빵을 뜯어먹을 때마다 그림자처럼 붙어있던 기억이 우걱우걱 씹힌다 그게 누구든 그럴 줄 알았다 우리는 매번 빵에게 당한다 이미 지켜보고 있었던 이야기다 노후는 미래에서 오는 게 아니라 과거에서 온다

내가 읽은 시 2024.07.18

자정 - 이경림

자정   이경림     가죽 혁대처럼 질기고 긴 길의 끝에서 나는 보았네 가은*이라는 유리문을. 나는 보았네 그 속에서 수 세기가 내 몸을 돌아 나오는 것을. 지나간 들판 지나간 산 지나간 마을회관 지나간 밤의 광장이 보여주던 무성영화들. 나는 보았네 똥장군을 지고 가는 장수아버지, 취해 비틀거리며 골목을 돌아가던 아랫마을 김 영감, 어머니는 부엌에서 국수를 삶고 있었네, 할머니는 방안에서 어항 속 금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리며 이야기하고 있었네, 이마에 칸델라 불을 단 광부들이 막장으로 가는 비탈에 한 줄로 놓여 있었네 한 떼의 개미들처럼 나는 보았네 검고 둥그렇게 서 있는 옥녀봉, 비탈에 자지러지게 피어있는 도라지꽃, 구호물자를 받으려 줄을 선 사람들, 악동 형태는 전봇대를 타고 고압선 쪽으로 오르고 있..

내가 읽은 시 2024.07.15

역광의 세계 - 안희연

역광의 세계   안희연(1986~ )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었다    거기   한 사람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한 페이지도 포기할 수 없어서    밤마다 책장을 펼쳐 버려진 행성으로 갔다   나에게 두개의 시간이 생긴 것이다    처음엔 몰래 훔쳐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   너는 정말 슬픈 사람이구나   언덕을 함께 오르는 마음으로    그러다 불탄 나무 아래서 깜빡 낮잠을 자고   물웅덩이에 갇힌 사람과 대화도 나누고   시름시름 눈물을 떨구는 가을   새들의 울음소리를 이해하게 되고    급기야 눈사태를 만나   책 속에 갇히고 말았다    한 그림자가 다가와   돌아가는 길을 일러주겠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빛이 너무 가까이..

내가 읽은 시 2024.07.10

연길, 도문, 백두산, 용정

지난 2일부터 4일까지 2박 3일의 짧은 일정으로 아내와 나는 백두산(북파) 여행을 다녀왔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외국여행은 처음이다. 여러 여행사를 통해 모인 16명의 여행객들은 대구공항에서 티웨이 항공편으로 11시 10분에 출발하여 연길(옌지) 공항에 현지시간으로 12시 30분에 도착하였다. 1시간이 늦어지는 시차를 감안하면 2시간 20분을 비행한 셈이다. 그런데, 연길은 경도상經度上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포항과 비슷한 위치라서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은 거의 같을 텐데 어째서 1시간의 시차가 있는 것일까? 그건 중국이 동서로 긴 국토를 가졌으면서도 동경 120도를 기준한 단일 표준시를 사용하고 우리나라는 동경 135도를 기준한 표준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연길 상공에 이르기 훨씬 전부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