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철

본래적 자아를 찾아 떠도는 유랑의 섬-신대철론 - 박남희

공산(空山) 2015. 12. 24. 11:55

본래적 자아를 찾아 떠도는 유랑의 섬-신대철론
박 남 희
 
 
신대철 시인을 만나 뵈려고 국민대를 찾은 날은 공교롭게도 현대시 송년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나와 함께 시산맥 동인으로 있는 배홍배 시인(사진 담당)과 국민대 앞에서 오후 3시에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배홍배 시인이 초행길이라 30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북악관 15층으로 올라가니 연구실의 문이 열려있고 연구실 안의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신대철 시인이 우리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저녁햇빛 사이에서 온화한 북악산을 보는 듯 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사실 나는 신대철 시인을 그 날 처음 보았다. 자연 친화적인 시인의 자연 친화적인 모습은 맑고 겸손했다. '고려대학교 장서'라는 검은 도장이 찍혀있는 두 권의 시집을 무책임하게(?) 들고 있는 나를 보고 신대철 시인은 친절하게 그의 두 번째 시집에 싸인을 해서 건네주었다.
 
사실 그는 올 4월에 갑자기 각혈을 하고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여 11월까지 치료를 받고, 지금도 약을 먹고 있다. 그의 병명은 "양의로는 제대로 진단하고 치료할 수 없는 병"이라고 하는데, 일종의 폐기종이라고 했다. 그를 치료한 덕유산 근처에 사는 한의사는 그에게 담배를 끊고 강의와 시 쓰기도 하지 말라고 권고했는데, 그는 내년이 안식년이라 일을 계속하고 있노라고 했다.
 
신대철 시인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차츰 그가 어쩌면 거대한 숲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 안든' 수많은 길을 내장하고 있으면서 군데군데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숨기고 있는, 참으로 특이한 숲. 나는 그 숲이 점점 궁금해졌다. 1977년에 처음으로 자신을 열어 보이고, 그 후로 2000년까지 자신을 꼭꼭 숨겨두었던 이상한 숲,(그는 1977년에 『무인도를 위하여』라는 이름의 첫 시집을 낸 후 23년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2000년에야 두 번째 시집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를 낸 바 있다) 그 숲에 숨겨져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궁금했다. 신대철 시인은 소박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개인사를 소상하게 들려주었다.(이 글은 당일의 대담을 중심으로, 『유심』2002년 가을호에 실려있는 장철문 시인의 대담글과, 『문학사상』1979년 6월호에 실려있는 김승희 시인의 대담글에서 보충했음을 밝힌다)
 
신대철 시인은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던 해인 1945년에 충남 홍성 오관리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은 청양군을 떠돌며 칠갑산 일대에서 보내게 된다. 그의 시 「칠갑산 1·2」를 보면 자연과 더불어, 자연이 되어 살아가던 시인의 아름다운 유년체험이 어떠했는지 그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소년들이 모이는 밤은 보름달이 물가 청머루 덩굴 숲 속에서 기다립니다. 소년들은 달을 따라 馬峙里에서 제일 높아 보이는 꾀꼬리봉에 꼬불꼬불한 산길을 놓습니다. 上峰에 올라서면 또 上峰, 칠갑산은 정말 아흔아홉 봉우립니다. 아흔아홉 골짜기엔 다른 山에서 흘러 들어온 온갖 잡새가 떠돌고 합대나무골 철이 아버님처럼 코를 골며 이빨 갈며 잠 험히 자는 숱한 산울림 소문들, 아득한 백마강 쪽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은 넓은 떡갈나무잎에 느닷없이 달빛을 뿌립니다.
 
저게 계룡산?
저게 오서산?
장곡사는 어디?
까치내는? 참, 邑內는?
 
아아, 달빛에 반사되어 달이 되는 호기심
호기심이 소년들을 홀려 上峰에서 上上峰으로 밤새도록 끌고 다닙니다.
 
--「七甲山 1」전문
 
칠갑산 깊은 산속에서 소년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뛰놀던 모습들, 그러면서도 시인의 유년은 '합대나무골 철이 아버님처럼 코를 골며 이를 갈며 잠 험히 자는 숱한 산울림 소문들'로 상징되는, 6.25 전쟁 전후의 어수선한 시대상과 아픔을 숨기고 있던, 불안 속의 평화를 누리던 시절이다. 그의 시 「첫 기억」에 나오는, 눈부신 햇빛과 거대한 나무와 나무그림자가 있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끝끝내 남아 있던 '그곳' 역시, 시인이 외롭던 유년체험의 연장선상에 있다. 시인의 유년의 기억 속에 환영처럼 남아 있던 '그곳'은 그 후에도 종종 꿈속에 나타나서 영영 지워지지 않아 십 년에 걸쳐 수십 번 그곳을 찾아 헤맨 끝에 마침내 그 장소를 찾아내게 되고, 그 후부터 그런 환영이 다시는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 그 장소는 나중에 알고 보니 청양군 남양면 '거부미(새터)'라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위의 인용 시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인의 유년시절의 산 체험은 그의 시를 자연친화적인 시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시절이야말로 신대철 시인이 자연 속에서 일체화된 연대의식을 느끼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도 그의 집안이 풍비박산 나면서부터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시인의 개인적 가정형편상 양해를 구하는 바람에 개략적인 사정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다.) 그 때가 그가 국민학교 5학년 때였는데, 그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시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할머니 댁에서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 하지만 대학 입학 후 그것마저 여의치 않게 되어서 시인은 혼자 칠갑산 자락 '밤안이'에서 살다가 산 속으로 들어가 합대나무골이라는 곳에서 폐병환자가 버리고 간 산막에 거처를 정하고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게 된다. 당시의 이러한 가정환경은 결국 대학을 일년동안 휴학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시인은 이 시절의 산 속 생활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기거할 곳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쫓겨든 산 속은 시인에게는 '무인도'와 같은 곳이다. 그의 첫 시집에 보이는 「무인도」,「아무도 살지 않는 땅 1·2」, 「사람이 그리운 날 1·2·3 」, 「處刑 1·2·3」연작들과 두 번 째 시집의 「水刻畵」연작들은 당시의 시인의 삶의 정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시들이다.(시인에 의하면 「水刻畵」연작은 첫시집에 들어갔어야 하는 작품들인데 분량이 넘쳐서 두 번 째 시집에 넣었다고 한다.) 이런 시들은 특히 그와 가깝게 지내던 유일한 친구이며 초,중학교 동창인 '박재석'(당시 청양군 운곡면 '어설티'라는 마을에 살았다고 함. 지금은 김해평야 끝자락 '진례'에서 알스트로메리아 꽃 농장을 경영하고 있다. 그와 관련된 시편으로는 초기시는 물론이고 [한여름 우포늪을 스치면 몸 속에 미소가 번진다], [알스트로메리아] 등에도 나타난다.)을 향한 그리운 마음을 표현한 시들이라고 시인은 그 내력을 소상히 들려주었다.
 
떠돌던 이 맨 손으로 들어와
폐병 고치고 비운 산막에
나도 맨 손으로 들어와 문지방에 걸터앉았다.
 
구멍 숭숭 뚫린 지붕, 번개무늬 흙벽
산길 내려오는 그늘 진 비탈을
뒤틀어 오르는 참나무들,
 
사이사이 얼비치는 빛살 놓치지 않고
살아야지, 갈대밭에 논 다랑이 치고 물 대고
살아야지, 바람 드는 길목에 밭 한 뙈기라도 둬야지
 
사람이 그리운 골짜기에 불지르고
서해안으로 치솟는 불길 휘어
사방에 불씨 남기는 맞불 놓고
온몸으로 안아
얼어터진 물웅덩이로 몰고 가야지,
 
물소리는 물로 밀어내고 바람소리는 바람으로 쓸어내고
 
--「水刻畵 1」전문
 
특히 이 시의 3,4연의 "사이사이 얼비치는 빛살 놓치지 않고 /살아야지, 갈대밭에 논 다랑이 치고 물 대고/살아야지, 바람 드는 길목에 밭 한 뙈기라도 둬야지 //사람이 그리운 골짜기에 불지르고"라는 구절은 당시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먹을 것이 없어서 하루에 고구마 몇 개로 끼니를 때우기도 하면서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던 이 시기는 시인에게 있어서 자신의 혼돈스러운 마음의 풍경을 복잡하게 지니고 살아가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복잡한 심정은 「水刻畵」연작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의 제자들은 특히 「水刻畵」연작에 나타나 있는, 한 시편 속에 다양한 감정이 다각도로 굴절되어 있는 모습을 '굴절시'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사실 그의 연보에는 대학입학 이전의 이력이 거의 생략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의 불행했던 가정사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일곱 살에 국민학교를 들어가고, 중학교는 청양에서, 그리고 고등학교는 공주에서 다니게 된다. 그는 공주사대부고를 졸업한 후 1963년에 연세대 국문과에 입학하지만 한 학기만 다니고 휴학한 후 칠갑산 산막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당시에 칠갑산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함께 살았느냐고 물으니, 처음에는 혼자, 그리고 나중에는 장씨라는 사람이 흘러 들어왔다고 했다.) 그는 일 년 후 복학하게 되지만 거의 학교생활을 하지 않고 졸업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그에게는 대학 친구들이 별로 없다.
 
그는 대학과 대학원을 거치는 동안 세 시인의 강의를 듣게 되는데 조병화 시인은 '국어'를, 박목월 선생은 수필론을, 박두진 선생은 시론을 가르쳤다고 했다. 시인은 박두진 선생과 수석을 채집하러 다니기도 했으며 그 때 채집한 수석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했다.
 
신대철 시인은 그가 신춘문예에 <降雪의 아침부터 解氷의 저녁까지>라는 시로 당선(당시 심사위원은 김수영, 박두진)한 1968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 후 ROTC로 군에 입대하게 되는데, 이 때의 군대체험은 후에 그의 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의 시 「비무장지대 일기 1·2」와 「×」,「우리들의 땅」,「실미도」등은 이 때의 군대체험이 잘 나타나 있는 시들이다.
 
"Х제국주의자들을 물러가게 하라! Х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인 Х도당들의 독재를 때려부수어라!"
"자유 없이는 행복도 없습니다. 자유는 제2의 생명입니다. 주저하지 말고 야음을 통해 비무장지대로 몸을 숨겼다가 날이 아주 밝아졌을 때 국군초소로 오십시오. 총구를 땅에 향하고 흰 헝겊이 있으면 흔드십시오."
 
풀어진 몸, 김이 모락모락 난다,
낡은 지뢰탐지기를 선두로
도로정찰조가 돌아온다.
조금 비 개인 날,
모래들은 山 밑에 하얗게 씻겨있다. 강물굽이를 돌아 나온 놀란 물새떼, 안개를 강가로 몰며 하나씩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우리들의 땅」일부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암흑 속에서, 북파
얼굴 비비고 뜨거운 손 마주잡고, 북파
빗속에 눈물 감추고 으스러지게 껴안아, 북파
 
얼굴도 이름도 기억할 수 없는 그대들
숨소리와 앙상한 뼈 감촉만
몸 속에 품고 돌아설 때
뒤늦게 떨려오는 발걸음들,
 
북쪽은 물안개에 잠겨 실미도 같은 섬들 떠다니고, 펴오르는 안개 누르고 누르던 검은 하늘, 우리는 갈라진 땅 갈라놓고 무슨 생각에 갇혔던가, 산등성을 타고 달려가 푸른 기운 맞이하던 그 새벽에, 조국 잃은 친구까지 숨막히게 불러대던 그 새벽에, 이랴이랴이랴 소 몰고 들판으로 나가던 그 새벽에, 누구를 위해 갈라진 땅 다시 가르고 누구를 향해 자유의 소리 방송을 하였던가,
 
-- 「실미도」일부
 
첫 번째 인용 시 「우리들의 땅」을 보면, 시인이 ROTC로 군복무를 하던 비무장지대의 긴장된 대치상황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남북이 서로 대남, 대북 방송을 통해 그들의 이념과 자유를 선동하고, 선무방송을 하던 모습들, 포대경 저 쪽 적들의 얼굴을 보며 바보같이 웃기도 하던 일을 생각하며 시인은 "생이란 무엇일까? 적? 죽음이란? 적? 땅이란? 이념이란?"무엇일까를 반문한다. 시인의 이러한 물음은 두 번 째 인용 시 「실미도」에 오면서 더욱 급박하게 전개된다. ('실미도'는 당시에 북파 공작원을 훈련시키던 곳으로 인천 앞 바다 무의도 옆에 있는 섬인데, 시인은 제대 후에 그곳을 직접 처음으로 찾아가 보고 비무장지대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이 시를 썼다고 한다)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다만 눈물을 감춘 채 뜨거운 손과 얼굴을 비비고 동료를 북파시켜야 했던 비정했던 당시의 상황은 시인으로 하여금 "누구를 위해 갈라진 땅 다시 가르고 누구를 향해 자유의 소리 방송을 하였던가"라는 자성의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 대담 중에도 시인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그 당시에 받았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그 때의 충격은 끝끝내 시인을 괴롭혔다고 했다. 이러한 죄의식은 결국 시인이 첫 시집을 내고 두 번째 시집을 내기까지 23년이 걸리게 되는 간접적인 원인이 된다. 이에 관한 사항은 시인이 창작과 비평사가 제정한 제4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하고 소감을 밝힌 글(『창작과 비평』2002년 겨울호)에 더욱 소상히 나타나 있다.
 
저는 한때 '인간적 진실'과 '진실' 사이에서 방황했습니다. 진실 앞에 수식어를 쓰지 않고 서는 살 수 없을 만큼 혼돈에 빠져 있었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의 현장에서 사선을 넘으며 공작원을 북파시킨 일이 죄의식으로 남아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군복무를 험하게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분단의 씨앗을 키웠다는 자책감에 제대로 시를 매듭지을 수 없었습니다. 첫시집 <무인도를 위하여>는 저를 인간적으로 받아들이고 정신적인 균형을 잡기 위하여 쓰여진 시집입니다.
 
제 고통은 그대로 생활로 이어졌습니다. 결혼 후 스무 번이나 집을 옮겼습니다. 가난하기도 했고 어딜 가도 마음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아이오와 대학에서 주최한 <국제 창작계획>에 참여하면서 저는 조금씩 제 고통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모습은 분단된 나라에서 온 시인들의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제 고통은 제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 한민족의 것이었습니다. 저는 새로 살고싶었습니다. 북극 얼음 사막으로, 황막한 고비 모래사막으로, 초원으로 헤맨 것은 삶을 다시 회복해 보려는 하나의 몸부림이었습니다. 북극을 떠도는 동안 만난 북한 사람은 제 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비무장지대에서 포대경에 잡히던 북한 사람을 극지에서 마주보고 살아가는 일은 꿈만 같았습니다. 남북은 실상이 아니라 허상에 불과했습니다. 제 시에 온기가 느껴진다면 그 온기는 그가 넘겨준, 그의 체온입니다.
 
이상의 소감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분단의 씨앗을 키웠다는 자책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아이오와, 알래스카, 북극, 몽골 등의 극지로 끝없는 유랑을 하게 된다. 이러한 극지 체험은 시인으로 하여금 시인이 잃어버렸던 원형적 삶에 대한 간접체험을 통해 시인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던 뿌리깊은 상흔(Trauma)을 치료해 주고, 그의 시에 다시 온기를 불어넣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말하자면 이러한 극지들은 시인이 회복하고 싶어하는 원형적 삶이 새롭게 꿈틀거리는 환유적 공간인 셈이다. 인용문에 나오는 '북극을 떠도는 동안 만난 북한 사람'은 시인이 1990년 알래스카 대학 교환교수로 가 있을 때 만난 '박평식'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그의 두 번째 시집의 제목이 된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연작은 시인의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들이다. 「극야-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1」에서 시인은 자신과 북에서 온 친구가 "서울이나 평야에서 오지 않고/ 사우스 코리아나 노스 코리아에서 오지 않고" 그들이 "어린 시절 맨 처음 구릉에 올라 마주친 달빛을 눈에 가슴에 다리에 받아와 꿈을 뒤척이던 그 금강 그 개마고원"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금강은 개마고원이고 개마고원은 금강이며, 북에서 온 친구와 자기는 결국 극지에서 마주보고 있는 幻月로서 자신의 뒤에서 "저절로 맞춰진" 하나의 "환한 얼굴"임을 확인하게 된다.
 
다음의 시는 북에서 온 친구와 하나가 되는 연대의식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33도, -23시
모든 시간은 태초로 돌아가고
툰드라엔 광물질만 남는 고독, 휘몰아치는 폭풍설
 
우리는 동네 전체를 휘말아 핀 소용돌이 눈꽃 속에서
손목이 마비되는 줄도 모르고 가족 사진을 바꿔보았습니다.
사진 몇 장을 나란히 맞추면 풍경 가득히 넘치던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당신의 아이는 강가에서 내 아이는 고원에서
마주보고 웃고 웃었던가요.
 
온 곳도 갈 곳도 잊고
우리는 금강의 개마고원에서 개마고원의 금강으로 오르내리다 농경 사회가 열리는 고릉지대를 지나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데까지 걸었습니다. 눈 속에 쓰러진 십자가를 세우며 나를, 당신을, 우리를 넘어, 쿵쿵, 쿵쿵쿵, 뜨거운 핏줄 속으로.
 
--「금강의 개마고원에서-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2」일부
 
인용 시를 보면 시인이 극지에서 북한사람을 만난 일은 분단과 분열의 역사가 있기 전의 시간, 즉 아득한 태초로 향해 가는 시간여행에 다름이 아니다. 시인은 "농경 사회가 열리는 고릉지대를 지나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데"까지 걸어가면서 "눈 속에 쓰러진 십자가"를 세우고 끝내는 "나를. 당신을, 우리를 넘어, 쿵쿵, 쿵쿵쿵, 뜨거운 핏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쓰러진 십자가"는 기독교의 예수를 가리키는 환유로서 구원의 회복, 즉 잃어버린 원형적 공간(낙원)의 회복을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원형적 삶을 회복하는 길은 '나'와 '너'라는 이분법적 단절의 벽을 넘어 '우리'라는 연대의식을 통해서 본래적 자아를 찾아가는 길인 것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있어서 남과 북의 경계는 너무나 하찮은 것이며, '나'라는 주체 역시 무수한 타자 속의 자아를 새롭게 만나는 과정 속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것임을 시인은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자아를 대상화시켜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그의 독특한 관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이미 그의 첫 시집에 나오는 시「自然水」에서 이러한 상상력의 일단을 보여준 바 있다.
 
山 밑으로 굴러 내리는 저 생나무 토막은 누가 찍어 넘기느냐? 나는 껍질이 까져 가는 생나무 토막으로 지어져 있다. 뒤틀리는 木造 3층, 2층은 방 전체를 창고로 쓴다. 폐품창고용이다. 3층은 오목렌즈로 되어 있다. 내 방은 1층 맨 구석 침침한 방이다. (중략)
 
대낮에도 3층은 햇빛의 발가락 하나 들어가지 못한다. 내가 가진 열쇠로는 물론 아내가 가진 열쇠로도 자물쇠를 열면 문이 또하나 문이 또하나……불빛으로 겹쳐진 문이었다.(중략)
 
나는 날마다 창고를 열어본다. 날마다 그날그날의 나를 창고에 버린다. 창고에 버려진 나는 버려진 것들과 함께 하던 일을 더욱 더 열심히 해 낼 것이다. 완성할 때까지, 그러나 완성하면 그 일과 함께 그 자리를 뜬다. (중략)
 
괴롭다. 나는 3층에서 흘러나오는 저 불빛으로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가? 괴롭다, 괴로움은 나로 하여금 또 밤을 새우게 하고 괴로움을 낳게 한다. 괴로움, 괴로움, 그리고 한 시대.
 
--「自然水」일부
 
시인은 이 시에서 자신을 껍질이 까져 가는 생나무 토막으로 지어진, 뒤틀리는 목조 3층 집으로 묘사하고 있다. 1층은 자신이 거처하는 방으로 밤낮으로 자신의 피를 태워서 불을 켜 놓아야 하는 방이고, 2층은 날마다 폐기된 자신을 버리는 창고이고, 3층은 불빛으로 겹쳐진 무수한 문이 달려있는 오목렌즈로 되어 있는 곳이다. 시인은 피를 태우며 1층 방에서 살아가면서 날마다 폐기되는 자신을 2층의 창고에 버리면서 3층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보면서 괴로워한다. 날마다 폐기되는 자신을 창고에 버리는 행위는 자아를 끊임없이 완성해가려는 몸부림이며, 시적 자아가 3층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보고 그것으로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를 괴로워하는 것은, 문을 열면 또 다른 문이 나오는 무수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의 어려움 때문이다. [自然水]는 한 마디로 말해 시인의 정신 구조를 드러낸 시이다. 베르그송 식으로 말하자면 자아를 통합하여 현재 중심의 지속의 시간을 순간화하여 새로운 자아를 역동적으로 맞이하려고 하는 그의 생의 자세를 잘 보여준다. 그가 생면부지의 외지인들에게서 연대의식을 느끼는 것도 그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이러한 의식의 뿌리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신대철 시인의 이러한 의식은 그의 신산한 삶이 가져다준 생래적 자기반성의 결과물로 보인다. 흡사 이상의 시를 연상케 해주는 이 시는 매우 자의식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시 「또 만납시다, 지구 위에서」, 「神市」등에 나오는 '미래인'의 개념 역시 그가 상정하고 있는, 자아를 바라보는 무수한 또 다른 자아 중의 하나이다. 시인은 당시의 지난한 삶의 고통을 '미래인'이라는 새로운 자아를 통해서 극복해보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시인은 일기를 즐겨 쓰는데, 일기 속에서 '나'를 '그'라고 지칭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이런 습관 역시 자신을 객관화해서 바라보려는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쓰다보니 어느새 시 평론 쪽으로 흘러가 버렸는데,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서 이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나는 신대철 시인과 대담을 하면서 몇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그 한가지는 그가 언제 세 번째 시집을 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앞으로 어떤 시를 쓸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에 의하면 내년 3월쯤에 문학과 지성사에서 세 번째 시집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이런 추측은 물론 개략적인 것이고, 그는 앞으로 좌절과 불안, 공포에 쌓인 글보다는, 시의 틀도 바꾸어서 '힘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소망을 말했다. 아마 이러한 시인의 소망은 그가 2,30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발표하지 못한 200여 편의 시들이 시집으로 묶여져 나온 후에 우리들 눈앞에 가시적으로 펼쳐지리라 생각한다. 그의 최근 시편들은 '빗방울화석' 시인들과 공동체험을 하면서 시의 현장체험을 살려 쓴 공동시집 {산늪}, {곰배령 넘어 그대에게 간다} 등에 일부 발표되어 있다.
 
내가 신대철 시인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그의 시는 우리의 전통적 자연시의 문맥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자연의 구체적인 사물들을 통해서 복잡한 인간의 내면의 뿌리까지 울려주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신대철 시인의 시는 개성적이다. 그의 시는 허황된 상상력의 함정을 벗어나게 해주는 진정성에 뿌리를 둔 체험이 있고, 체험의 고답성에 빠지지 않게 해주는 중층적 이미지와 상상력이 있다. 특히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체험은 그의 시를 개성적이게 해주고 빛나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현대시》200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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