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일기

팔공산 종주(3) - 능성재에서 초례봉까지

공산(空山) 2024. 1. 15. 21:22

오늘은 팔공산 주능선의 동남쪽 끝자락을 이루고 있는 환성산과 초례봉을 등산하기 위해 아침 8시에 집을 나섰다. 여러 날 벼르던 것을 오늘 실행하게 된 것은 오랜만에 미세먼지가 적다는 예보가 있었던 데다 월요일이라 등산로가 한산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의 이번 능성재ㅡ초례봉 종주는 지지난해 겨울의 파계재ㅡ염불봉을 시작으로 그해 가을의 동봉ㅡ관봉(갓바위)에 이은 세번째 팔공산 구간 종주가 되는 셈이다.

갓바위행 '401번' 버스를 타고 '갓바위삼거리'에서 하차하여, 거기서 능성재(우정식당)까지 3.2km 구간을 걸었다. 이곳의 진인동과 능성동에는 예전에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와 중학교 동기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들도 나처럼 먼 학굣길을 걸어다녀야 했었다. 15년쯤 전에 이 넓고 곧은 도로가 개통되어서 옛날보다는 교통이 많이 편리해졌다.
 
 

솔숲에 가려진 능성동 '큰마을' 앞에는 부근에 있는 예비군 훈련장을 이전하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10:00, 05,000 능성재(우정식당)

능성고개에 도착했을 땐 10시였고 만보계는 벌써 5,000보를 기록하고 있었다. 우정식당 맞은편, 친구의 옛집 옆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집 모퉁이에 서 있는 큰 목련나무가 친구를 대신하여 나의 등산을 응원해 주는 듯했다. 몇 걸음 걸으니까 전봇대 옆에 서 있는 이정표가 환성산까지의 거리는 3.6km라고 알려 주었다.

 

우정식당 맞은편의 등산로 입구와 이정표. 이정표에는 환성산 3.6km, 갓바위 2.2km라고 표시되어 있다.


10:40, 08,600 너럭바위를 떠나며

입산한 후 40분쯤 걸어 전망이 확 트이는 너럭바위에 올라섰다. 나는 눈 아래 펼쳐진 마을 풍경을 사진찍어 이 마을이 고향인 친구에게 안부를 전할 겸 보내 주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환성산, 낙타봉, 초례봉을 거쳐 반야월 쪽으로 하산하려면 오늘도 하루해가 빠듯할 것이다.

친구에게 고향 마을을 찍은 사진을 전송하고 나서 홀로 먼길을 떠날 때, 내가 꼭 미국의 우주 탐사선 '보이저(Voyager)'호가 된 기분이 든 것은 지나친 감상(感傷)이었을까? 보이저는 175년마다 돌아오는 절호의 기회인 '행성 정렬'에 맞춰 1977년 8월에 2호가, 보름 후에 1호가 발사되어 47년째 우주 항해를 하고 있다. 그동안 두 탐사선은 역할을 분담하여 외행성인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과 그들에 딸린 위성들을 근접 탐사하며 수많은 사진 자료들을 NASA에 전송해 주었다.

지금은 인류의 고향집이자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인 지구와 고향 마을 격인 태양계를 영영 뒤로 하고, 지구로부터 242억km(1호)와 202억km(2호) 이상 떨어진 곳에서 시속 6만1천km(1호)와 5만5천km(2호)의 속도로, 즉 목성과 토성(1호), 또는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2호)을 스윙바이(swing-by)할 적에 얻은 속도 그대로 성간 우주를 지나고 있다고 한다. 2030년쯤이 되면 지구와의 교신에 필요한 전력은 바닥나지만, 지구인들이 외계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담은 음반(Golden Record)을 싣고 보이저는 앞으로도 수만 년, 수십만 년 동안 다른 행성계를 향해 정처 없는 여행을 계속할 것이라고 한다. 

한적한 산길을 걷는 동안 내내 나의 여정도 삶도 어쩐지 그들을 닮은 것만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긴 우리 모두는 저마다 먼길을 가야 하는 외로운 '여행자(voyager)'들이니까.


저 아래 화면 중간쯤이 능성재이다.
진인동, 백안동, 미대동이 내려다보인다. 그 너머로는 왼쪽부터 문암산, 공산, 응봉, 응해산, 도덕산이다.
등산로 안내 리본이 예쁘다.


입산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밧줄을 타야 하는 벼랑이 나왔다. 환성산은 멀리 경산 쪽에서나 대구 쪽에서나 팔공산의 고향마을 쪽에서나 어디서 바라보아도 비탈이 완만한 대칭형의 순한 산으로만 보였었다. 그런데 실제로 등산을 해 보니 무척 험한 산이다. 날카롭고 오르내림이 많은 능선들과 깊은 계곡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산은 멀리서 바라봐야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했던 옛 시인도 있지만, 가까이 겪어 봐야 알 수 있는 것이 또한 산인 것 같다. 사람의 마음처럼 말이다.
 

친절한 이정표들


올겨울 들어 시내에는 아직 눈다운 눈 한번 오지 않았는데, 여긴 언제 내렸는지 응달에는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눈 위에 찍힌 토끼 발자국과 토끼 똥이 눈에 띄어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예전에 내가 어릴 적에는 야산에서도 토끼를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좀처럼 볼 수가 없다. 
  

반가운 토끼의 똥과 발자국
환성산 앞의 헬기장

 
12:10, 14,500 환성산에서
 
능성고개에서 입산한 지 2시간이 더 지나 환성산 정상에 도착했다. 그건 자전거만 타다가 오랜만에 하는 등산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무리하지 않도록 천천히 걸은 결과다. 여기서 북쪽의 팔공산은 비로봉과 동봉이 겹쳐서 보였고, 멀리 서쪽으로는 가야산 봉우리가 구름 위에 솟아 있었다. 남쪽으론 대구 시가지 너머로 비슬산이 보였지만 시야가 많이 흐렸다. 오늘 내가 가야 할 초례봉도 멀리 내려다 보였다. 여기서 초례봉까지는 3.4km.
 
처음으로 환성산에 오른 만큼 정상인 '감투바위'를 배경으로 표지석과 함께 앉아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어 줄 사람도 삼각대나 셀카봉도 없었지만, 나는 주먹만한 돌을 이용하여 폰카메라를 바위 위에 세우고 타이머를 작동시켜 사진을 찍었다. 즉석에서 카메라를 받쳐 주는 바위와 돌은 무겁게 지고 와야 하는 삼각대나 너무 짧아서 사진의 원근감을 왜곡하는 셀카봉보다 편리하고 쓸모가 있었다. 가지고 온 삶은 고구마와 귤로 점심을 먹었다. 며칠 전 불로5일장에서 산 엿도 산길을 걸으며 먹으니 별미였다.
 
 

삼각대도 셀카봉도 없이 돌을 이용하여 찍은 셀프 사진
환성산에서 바라본 팔공산 모습. 비로봉과 동봉이 겹쳐 보인다.
소나무 너머 앞쪽 분지는 평광동이고, 멀리 구름 위로 가야산 꼭대기가 보인다(사진 중앙 윗쪽).
대구 시가지 뒤로 보이는 앞산과 비슬산(왼쪽 사진)과 초례봉.

 
13:30, 16,800 새미기재
 
환성산 감투봉을 떠나 낙타봉을 향해 한참 내려오다가 '새미기재'를 만났다. 이곳은 서쪽의 평광동과 동쪽의 하양읍이 만나는 고개다. 예전에 불로동과 도동, 평광동 사람들이 하양장에 가거나 하양 사람들이 불로장(해안장)에 갈 때 내왕하던 고개라고 한다. 지금은 양쪽 길 모두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지만 평광동 쪽은 무슨 이유인지 차가 다니지 못하게 철책으로 막아 두었다. 25년쯤 전이었을까. 내가 수성구(신매동)에 살 적의 어느 가을날, 아내와 함께 도토리를 주울 겸 바람을 쐬러 SUV를 몰고 하양쪽에서 이 고개까지 와 본 적이 있다. 그때는 비포장 길이었다.
 
낙타봉으로 가는 길에서는 벌써 탐스럽게 부푼 꽃망울을 달고 있는 생강나무를 만났다. 오랜만에 굴피나무도 만났다. 진흙에 방금 찍고 간 큼직한 멧돼지 발자국도 만났다. 낭떠러지 위로 난 길은 얼음으로 덮여 있어서 위험했지만, 밧줄을 붙잡고 조심조심 지나갈 수 있었다.

 

새미기재. 오른쪽의 평광동 방향으론 철책으로 막혀 있다.
새미기재에 서 있는 안내판들
낙타봉과 초례봉(왼쪽 사진). 생강나무 꽃망울
굴피나무 열매와 멧돼지 발자국
낙타봉과 초례봉
뒤돌아본 환성산과 얼어붙은 등산로
낙타봉 세 봉우리와 오른쪽으로 멀리 보이는 초례봉.

 
14:20, 20,000 낙타봉에 도착
 
낙타봉은 초례봉과 함께 예전에 친구들과 두어 번 와 본 곳이다. 아내와 함께 온 적도 있는데 하드 디스크에 저장된 사진을 찾아보니 벌써 11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아내도 친구들도 무릎이 아프다며 이런 높고 험한 산엔 오지 않으려고 한다. 낙타봉은 세 봉우리로 되어 있어서 멀리서 바라보면 낙타가 아니라 매의 머리와 양쪽 날갯죽지처럼 보인다. 단봉이나 쌍봉 낙타는 있어도 삼봉 낙타는 세상에 없다. 그래서 차라리 '매봉'이라고 이름 지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낙타봉 뒤로 환성산이 보이고 그 너머로는 팔공산도 보인다.
낙타봉에서 바라본 초례봉.
멋진 등산로(오른쪽)와 낙타봉에서 바라본 하양읍.
마른 잎을 떨구지 않고 있는 토종 단풍나무와 낙타봉 세 봉우리(오른쪽 사진 윗쪽 가운데). 내겐 낙타가 아니라 매같이 보인다.


16:00, 24,000 초례봉 도착
 
드디어 오늘 등산의 마지막 산인 초례봉에 도착했다. 환성산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지만 여기선 두 사람을 만났다. 모두 반야월 쪽에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여기선 사진을 서로 찍어 주었다. 어디든 가면 10년만이고 20년만이니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싶어서 여기서도 나의 모습이 들어간 사진을 찍었다. 대기가 아까보다 더 맑아졌는지 파란 하늘 아래 멀어진 팔공산이 선명하다.  
 
 

초례봉 너머로 멀리 팔공산이 선명하게 보인다.
신서골로 하산하던 중 반가운 물소리를 들었다.
3만보를 넘기자 발바닥이 아프고 하산길은 지루했다.

 
 

18:00, 33,000 하산길에서 만난 것들
 
아침에 랜턴은 챙겨 왔지만 어둡기 전에 하산하려고 서둘렀다. 매여동 쪽으로 하산하면 거리는 가깝지만 버스를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아서 신서골을 경유하여 혁신도시 쪽으로 내려왔다. 발바닥이 아파서 이정표가 가리키는 4.6km 하산 길이 무척 지루하게 느껴졌다.
 
신서골 중간쯤에서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했는데, 길 옆 산비탈에서 인기척에 놀라 후다닥 뛰어가는 것이 있었다. 나도 놀라서 쳐다보니 이내 조용해지고 잡목들 사이로 멀찍이 정체불명의 희고 둥근 접시만한 것 두 개가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손뼉을 한 번 치자 그들은 산등성이 쪽으로 사라졌다. 무엇이었을까? 계곡을 내려오면서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털빛이나 둥근 모양으로 볼 때 내가 잘 아는 너구리, 북방족제비, 수달, 담비, 오소리, 멧돼지, 고라니, 늑대, 여우, 삵, 스라소니, 반달가슴곰, 산양, 토끼 등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결국 버섯 전문식당에서 귀하다며 조금씩 내놓던 '노루궁뎅이버섯'에까지 생각이 닿았고, 그제서야 나는 산등성이를 넘어간 그 희고 둥근 것이 한 쌍의 노루 '궁둥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 걸은 거리는 모두 14.8km였고, 걸음수는 33,000보였다. 혁신도시에서 버스를 타고, 두 번 더 버스를 갈아타며 집으로 돌아왔다.
 
   갓바위삼거리 ― 능성재 3.2km,    
   능성재 ― 환성산 3.6km
   환성산 ― 초례봉 3.4km   
   초례봉 ― 신서 혁신도시 4.6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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