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푸른 밤 - 나희덕

공산(空山) 2023. 2. 25. 19:22

   푸른 밤

   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그곳이 멀지 않다민음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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