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모든 것이 희미한데 나는 소스라친다 - 김용택

공산(空山) 2022. 7. 27. 08:27

   모든 것이 희미한데 나는 소스라친다

   김용택 

 

 
   어느 날인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봄이었겠지.
   삽을 들고 어디를 가고 있는데,
   누가 주길래, 글쎄,
   누가 주었는지도 모르는,
   무슨 나무인지 자세히 물어보지도 않고, 봄이니까
   받아들고 걷다가
   여기다 심어야지 하는 생각도 없이
   여기쯤이 우리 땅이 아닐까 하며
   아무 데나
   몇 삽 파고 대충 심은 것 같은데,
   전혀, 꽃은 생각지도 않고
   별생각 없이
   그냥
   심은 것 같은데,
   심은 기억이 희미한데,
   모든 근거들이 희미한데,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희미한 산 아래
   외진 곳,
   (내가 왜 무엇하러 거기를 갔을까?)
   검은 바위를 제치고
   온몸을 드러내며
   가만가만 마을로 걸어들어가는
   저 흰 꽃은
   도대체 뭔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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