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 정채원

공산(空山) 2022. 7. 14. 09:03

    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정채원(1951~ )

 

 

    쉬지 않고 내리는 빗물이 사막에 수백 개의 호수를 만든다. 우기가 끝나면 가장 깊어지는 수심을 들여다본다. 떨어져 있는 호수와 호수가 하얗게 타는 모래 밑에서 서로의 냄새를 더듬는다. 바다에서도 본 적 없는 주황물고기가 헤엄쳐 다니는 사막 호수, 석 달이 지나면 사랑은 말라 버리고 모래에 처박힌 바퀴는 점점 더 꼼짝달싹 못할 것이고.

 

   모래바람 속으로 눈썹에 내려앉는 모래를 깜빡이며 걷고 또 걷는다. 건기 뒤에는 우기를, 우기 뒤에는 건기를 마련한 건 누굴까?

 

   그러나 건기를 지나도 또 건기, 우기를 지나도 또 우기, 그런 마을도 있다. 모두가 메말라 기억의 핏줄까지 마른 잎맥처럼 부서져 허공으로 흩어지던 마을, 혹은 젖고 젖고 푹 젖어 푸른곰팡이가 수국 꽃송이가 되다 쉰 밥덩이가 되다 수심 알 수 없는 웅덩이가 되던 마을, 모두가 제 안에 익사해 퉁퉁 불어 터지던 마을, 살아도 살아도 살아본 적 없는 사람들이 죽어도 죽어도 죽어 본 적 없는 얼굴로 분노의 고무줄을 계속 잡아당기던 마을, 의심을 풍선처럼 계속 불어 결국 터져 버리던 마을, 욕망을 계속 가열해 사랑하는 이들을 다 태우고 깨진 유리창과 검은 재만 남기던 마을,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도망치듯 떠나온 그곳.

 

   우기가 끝날 즈음, 도망쳐 온 사람들의 사막에 피어나는 석 달 동안의 오아시스. 짧은 천국은 서서히 말라 가고 갈라터진 바닥을 보이겠지만, 얼핏 본 주황물고기는 사람들 머릿속에서 계속 헤엄쳐 다니겠지, 다음 우기를 기다리면서

 

   ―『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천년의시작,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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