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도(棧道)
문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저녁이면 눈 닿는 공중에 잔도를 놓는다
공중도 벼랑이어서 딛고 설 자리 마땅하지는 않다
잔도는 무슨 세월처럼 간당거리며 공중을 건너고 그 아래 안개가 까마득하게 몰아친다
건너다는 말에서 지탱할 수 없는 여백을 읽어내듯 잔도는 혼자 버티는 중이다
혼자 홀로 이런 말을 들으면 어깨는 눈사태처럼 무너져 내린다
그래도 혼자다
이 밤 잔도를 건너 닿고자 한 곳이 무릉은 아닐 텐데
잔도를 건너오던 비몽을 마중하느라 복숭아꽃 두어 송이 꺾고 말았다
분명 이것도 큰 죄임에 틀림없다
나는 천 년을 두고 잔도를 놓아야 하는 노역의 벌을 이마에 새겼다
아흔아홉의 밤이 지나고 백 번째 날이 밝으면
판판한 돌 하나 짊어지고 첫날 매달아 두었던 잔도에 올라설 것이다
서툴렀던 솜씨에 이력이 붙더니 저물기 전에 잔도 하나 놓을 만큼 되었다
―『죄를 짓고 싶은 저녁』걷는사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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