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화양연화(花樣年華) - 권규미

공산(空山) 2022. 6. 12. 10:29

   화양연화(花樣年華)

   권규미

   날 선 볏잎들이 아버지의 노래를 들으며 부드러운 제 생각의 깊이를 이루는 동안 어린 나는 산그늘에 누운 바위 할멈에게 책을 읽어 주곤 했네 천연스런 그는 주름진 눈을 한 번도 깜박이지 않고 외로운 내 독서를 마른 호수에 드는 물길같이 잘도 받아마시었는데 그 천연스러움이 부러워 킁킁 더운 김을 부리며 엉덩이를 문지르는 늙은 암소를 바위도 나도 서로 웃고만 있을 때 산그늘 크단 입속에 골짜기 통째 잠겨버리고 심술로 뒤뚱거리는 소를 따라 우쭐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던 저녁들이 있었네 그 간절하고 나지막한 시간의 잎새들이 어스름 깃드는 저녁마다 별처럼 돋아나네 가뭄과 홍수와 햇빛과 바람 속에 그 무심하던 할멈 여전하신지 산그늘 당겼다 놓고 당겼다 놓으며 슬하에 곤줄박이 몇이라도 거두었는지 이슬의 행간을 빌려 편지를 쓰고 싶네 요새는 늙은 책이 나를 읽는 중이라고 쓸쓸한 소식 전하고 싶네

 

 

  *화양연화(花樣年華) :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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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규미

   경북 경주 출생. 본명은 혁주. 1994년 《문학세계》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2013년 월간 《유심》에 「희고 맑은 물소리의 뼈」 외 4편으로 재등단. 시집 『참, 우연한』『각시푸른저녁나방』이 있음.

   시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지난달(2022.05) 13년 만에 낸 두 번째 시집 『각시푸른저녁나방』 수록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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