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양파, 프랑스 혁명사 - 임재정

공산(空山) 2021. 9. 29. 08:23

   양파, 프랑스 혁명사

   임재정(1963~ )

 

 

   겨울엔

  〈프랑스 혁명사〉를 읽지, 얼음이 키들대는 갈피마다

 

   그때마다 가벼워서 무거운 눈이 내려

   창틀 유리컵 속 양파 뿌리가 유리창 가득 벌기도 하지

 

   그래, 책갈피에 침이나 묻히며 겨울은

   창밖을 엿보는 양파를 위해 입김을 불고 물을 받는 게 전부라서 좋아

 

   어디서 온 바람인지 몰라 수시로 창문이 반응하지만 바람을 핑계로 담요를 덮고 키들거리며 퇴행을 해도 그만

 

   그러나 출근을 하듯 정장을 하고

   가끔 목마른 양파와 함께 냉장고까지 산책을 간다네

 

   먼지 쌓인 구두 근처에서 잦아드는 길의 냄새, 아우성

   순백의 눈처럼, 금세 더러워지기도 하는

 

   혁명을 양파야 보았니? 창밖을 가혹한 겨울을

   이파리가 솟아오른 만큼 양파는 쭈글쭈글해지고

 

   누구든 밑동에 어떤 가려운 뿌리가 접 붙어 있대

   끝끝내 유머로 가득한 양파의 혁명사를 읽어

 

   우릴 둘러싼 껍질이 까르르 뒤집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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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운 방 안에서 프랑스 혁명사를 읽으며 유리컵 물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양파와 함께 지낸다는 단순한 내용의 시입니다. 그러나 곳곳에서 시인의 상상력과 유머가 번뜩입니다. 얼음이 키들대는 책갈피를 넘기다가 창밖을 엿보는 양파를 위해 물을 받고, 담요를 덮고 퇴행하기도 하며, 목마른 양파와 함께 정장을 하고 냉장고 앞까지 산책하는 것이 생활의 전부라고 하는군요. 먼지 쌓인 구두와 쭈글쭈글해져 가는 양파의 모습, 누구든 밑동에 접붙어 있다는 뿌리와 유머로 까르르 뒤집어진다는 양파 껍질에 대한 시인의 독특한 해석 등등이 모두 시의 구조나 분위기에 편승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책들 중에서 하필이면 프랑스 혁명사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양파와 병치한 것도 재미있고요. 이 시에서 전통적 의미에서의 주제라고 하는 것은 빈약해 보이지만,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가벼움이, 말하자면 시의 모더니티(modernity)가 독자에게 읽는 즐거움을 주고 있습니다. (김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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