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시

옛 나무들을 회상함 - 김상동

공산(空山) 2021. 6. 25. 19:24

   옛 나무들을 회상함

   김상동

 

 

   1. 미루나무

 

   분단국 국민들의 통일 의지만큼이나

   힘차게 하늘을 찌르며 펄럭이는

   우리나라 미루나무의 습성을

   나는 언제부터인가 자랑스럽게 바라보게 되었다

   관청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학교와

   모든 직장에서 펄럭이는 깃발의 수만큼이나 

   우리나라 방방곡곡에는 미루나무가 서 있었다

   사라호 같은 태풍이 불어와서

   이 나무들이 일제히 쓰러진다 해도

   그 움이 터져 나와 다시 자라는 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통일은 희망적이라고

   나는 언제부터인가 나름대로 생각해 보게 되었다

 

 

   2. 떡갈나무

 

   로지 겐*, 너를 사랑한다

   네가 죄를 모르고 부끄럼을 모르듯이

   나도 이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

   네 말마따나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까

   화내고 질투하고 욕심 부리며 살기엔

   우리들의 청춘이 너무 짧구나!

   사랑한다 로지 겐, 가식의 옷을 벗고

   떡갈나무 잎사귀가 멍이 들도록

   떡갈나무 잎사귀의 물이 들도록

 

 

   3. 소나무

 

   남들처럼 나도 마누라 하나 얻어서

   자식새끼 낳아서 키우며 살지

   그다지 많은 돈은 벌지 못해도

   밥 먹고 사는 데는 큰 불편이 없지

   직장에는 꼬박꼬박 충실히 나가고

   저녁엔 지쳐도 휘파람 불며 돌아오지

   그럭저럭 반평생을 살아왔으니

   남은 반평생도 쉬울 테지, 솔밭만 피해 가면

   그 놈의 솔밭 꼭꼭 찌르는

   내 눈도 찌르고 내 귀도 찌르고

   내 흰 목덜미와 등과 발바닥도

   내 양심도 꼭꼭 찌르는

   솔밭만 피해 가면

 

 

   4.

 

   자라기 시작하면

   일 년에 수십 자쯤이야 자라지

   해마다 쑥쑥 뻗어가는

   근원도 뿌리도 알 수 없는 동아줄로

   마음만 먹으면 무엇인들 못하랴

   세상의 모든 일이란 것도 얽히고설켜

   다 그렇게 덮여 가는 것 아니겠는가

   킬킬, 꼬고 조이고 비틀고 묶어라

   킬킬, 우리들의 숲속에 안정이 올 때까지

 

 

   *로지 겐(Rogie Gann) 윌리엄 서머셋 모옴의 소설 과자와 맥주에 나오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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