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입술의 시간
이인원
방금
발등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면
책갈피 속에 영영 잠들었을 이 한 컷
그때
셔터에 잡히지 않았다면
까맣게 지워졌을 장면들
기억 속에 순장된 얼굴
눈꺼풀 아래 매장된 만남과 이별
발굴이 되기도 도굴이 되기도 했다
누가 가슴에 삽을 댄 것일까
깜짝 놀라 깨어난 분홍 입술의 시간
벼락같은 한 장면과 다 늙어 죽어 다시 만난다면
네가 죽고
내가 산다면
내가 죽고
네가 산다면
그래도
나는 분홍색으로 질문했을 것이다
푸르렀던 젊은 날 개장해 보자
녹슨 애증의 시절 이장해 보자
도톰한 분홍 입술의 시간
자꾸 달싹거리는 날에는
―『그래도 분홍색으로 질문했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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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원 : 1952년 경북 점촌에서 출생. 숙명여자대학교 졸업. 1992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마음에 살을 베이다』, 『사람아 사랑아』, 『빨간 것은 사과』 등이 있음. 2007년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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