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솔방울을 위한 에스키스 - 허만하

공산(空山) 2020. 11. 19. 15:53

   솔방울을 위한 에스키스

   허만하

 

 

   흩어진 솔방울의 자리는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이슬에 젖은 차돌처럼 쓸쓸하게 빛나고 있다. 솔방울은 이따금 남은 날을 헤아리는 나이 든 어머니가 배후에 거느리는 어스름 같은 윤곽을 가지고 있다. 가을에 빛나는 햇과일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솔방울은 보랏빛 암꽃 씨방의 형태로 싱그런 바람에 뜨는 누런 송홧가루를 애타게 기다리던 수정 이전의 가슴 설레던 잠복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바람도 없이 부식토의 두께 위에 떨어진 솔방울은 자기가 종의 번식을 위한 적막한 도구였다는 사실을 슬퍼한 적이 없다. 오히려 어수룩한 갈색의 무표정 속에 자기 소임을 다한 긍지를 숨기고 있다.

   시장 들머리에 앉아 산나물을 팔고 있는 흰 수건 두른 할머니의 얼굴처럼 밑바닥에 잔잔히 빛나는 깊이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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