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기우는 동그라미 - 차주일

공산(空山) 2020. 11. 16. 19:16

   기우는 동그라미

   차주일

 

 

   달력 곳곳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동그라미를 이리저리 연결하면
   새로운 별자리 하나 생겨날 것도 같고
   한 가문을 지켜 주는 부적도 그려지겠다.
   동그라미마다 한쪽으로 찌그러져 있다.
   싹을 내어주고 텅 빈,
   씨앗 껍데기 같은 둥근 선을 들여다보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등 굽혀 머릴 맞대고 앉았다.
   모성 쪽으로 기운다는 동그라미를 바라보자니
   할머니의 기일을 묻는 아버지가
   어머니께 재가를 구하고 있다.
   달력에서는 모성이 가장이다.
   어머니에게 가부장권을 넘겨준 음력이
   양력을 앞세우고 뒤따라가고 있다.
   동그라미 속 날짜를 읽는
   어머니의 눈까풀도 한쪽으로 찌그러져 있다.
   내게는 그저 숫자로만 보이는 날짜인데, 어머니는
   한쪽으로 닳는 인감도장 테두리 속 이름으로
   정화수 그릇 속 얼굴로 읽는 것이다.
   나도 어머니 흉내를 내며
   새끼들 생일에 동그라미를 쳐 둔 적 있지만
   그저 사야 할 양초 개수만 보일 뿐이어서
   촛불 밝기를 믿는 나는 양력으로 앞서 나가고
   사연을 짐 진 어머니는 그믐처럼 뒤따라오고 있다.
   음력으로만 기록되는 사연이 얼마나 무거운지
   어머니 안짱다리가 점점 한쪽으로 기울고 있다.

'내가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묏버들 가려 꺾어 - 홍랑  (0) 2020.12.07
솔방울을 위한 에스키스 - 허만하  (0) 2020.11.19
그러했으면 - 문성해  (0) 2020.11.15
먹염바다 - 이세기  (0) 2020.11.12
하마단 - 현담  (0) 2020.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