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일기

시집 출판 준비

공산(空山) 2020. 8. 20. 22:34

내가 어릴적에 읽었던 시의 기억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있다. 저물녘에 동네 뒷산에서 나팔을 불었다는 정도의 구절만 기억에 남아 있을 뿐 제목조차도 떠오르지 않는다. 국민학교 때의 교과서에서 읽었는지 중학교 때 읽었는지도 구별이 되지 않지만, 그 회화적인 시의 분위기를 생각해 볼 때 작자는 김광균쯤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지금 검색을 해 보니 용케도 전문이 나와 있다.
 
   언덕
   김광균
 
   심심할 때면 날 저무는 언덕에 올라
   어두워 오는 하늘을 향해 나팔을 불었다.
   발 밑에는 자욱한 안개 속에
   학교의 지붕이 내려다보이고,
   동네 앞에 서 있는 고목 위엔
   저녁 까치들이 짖고 있었다.
 
   저녁 별이 하나 둘 늘어 갈 때면,
   우리들은 나팔을 어깨에 메고
   휘파람 불며 언덕을 내려왔다.
   등 뒤엔 컴컴한 떡갈나무 수풀에 바람이 울고,
   길 가에 싹트는 어린 풀들이 밤 이슬에 젖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뒤늦게 취미로 트럼펫을 불게 된 것이 이 시의 영향을 조금은 받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읽어 보면 왜 교과서에 실렸는지 의아할 정도로 밍밍하기만 한 시이지만.
 
어쨌든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국어 시간과 시 읽기를 좋아해서 김소월이나 윤동주의 시들을 읽곤 했지만, 시를 직접 써 보는 데엔 많이 게을렀다. 그도 그럴 것이 시 창작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34년이라는 긴 세월을 한 직장에 근무하면서 직장 동료들이나 친구들과 시장 뒷골목을 찾아 헤매며 술을 마시거나 낚시, 여행 등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데만 급급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직장에서 해마다 직원과 가족을 대상으로 ‘문예큰잔치’라는 것을 열어 꽤나 많은 상금을 주곤 했는데, 내게 시력(詩歷)이 있다면 거기서 서너 번을 내리 장원을 한 것이다. 그 뒤 퇴직을 할 무렵에는 한 시 전문 계간지에 투고를 하여 신인문학상을 받게 되어 등단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고, 지금은 대구문인협회 회원으로 되어 있다.
 
나의 시력이란 것이 이렇게 미천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써 둔 시가 100편은 훌쩍 넘어서는 데에 이르렀다. 주위의 아는 사람들에게만이라도 보여 줄 수 있는 시집을 한권 엮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지난해에 국가문화예술위원회에서 공모하는 창작 지원금 신청을 했었다. 기발표작 7편과 미발표작 7편의 작품, 집필 의도 및 계획, 등단 증빙 자료, 활동 자료 등의 심사항목이 있었는데, 꼴좋게 탈락되고 말았다. 그래서 올해는 다시 대구문화예술위원회에서 공모하는 ‘개인예술가(문학분야) 창작지원금’에 작품 5편, 문학활동 증빙자료 등을 제출하여 응모를 하였고, 다행히도 창작지원 대상자로 선정이 되었다. 이로써 아내의 눈치를 덜 보고도 숙원사업인 시집을 출간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금액(3백만원)이 적어 내가 더 보태야 되겠지만.
 
그래서 올해 안으로 시집을 발간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받은 창작지원금은 연말까지 국가문화예술지원시스템을 통하여 철저히 정산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졸시 ‘구름의 뿌리’를 표제시로 정하고, 4부로 나누어 목록을 대강 분류해 보았다. 가장 큰 걱정은, 많이 미흡하다고 생각되는 시들을 다 추려내고 나면 남은 시들로 시집을 엮을 분량이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대체로 짧은 시들이 많아서 적어도 80편은 되어야 할 것이다. 미흡한 시로 분류하여 제쳐 둔 것들을 보완해서 다시 목록에 끼워 넣는 것이 요즘 내가 하는 일이지만, 아내와 함께 텃밭에 나가랴 유튜브 시사 프로그램을 시청하랴 쉬운 일이 아니다. 9월 초순까지는 원고 정리를 마쳐 평론가에게 해설을 부탁하고, 시월 초순쯤엔 출판사에 넘길 계획이다.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출판사는 바빠질 것이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
 
늦깎이로 등단한 나의 첫 시집은 그렇게 해서 연말쯤엔 발행이 되겠지만, 여전히 걱정과 의문은 남는다. 나 같은 무명 시인의 시집을 유심히 읽어줄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내게도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시집을 출판했다며 보내주는 시집이 많았지만, 대개는 몇 편 읽어보다가 던져 버리기가 일쑤였던 것이다. 하나같이 그렇고 그런 시들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보내 주신 시집의 주옥편들은 두고두고 음미하겠습니다'며 인사는 잘 하고 넘어가곤 한다. 나의 시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부류에 속하는 것은 아닐까? 세상에 또 하나의 번잡만 보태는 꼴이 되지는 않을까? 그렇다고 여기서 시집 출판을 포기한다면 그 또한 크나큰 후회가 될 것이다. 아무쪼록 최선을 다해 출판을 하는 수 밖에 없겠다.
 
 

텃밭의 이랑에는 무슨 품종들의 배추와 무를 몇 포기나 심어야 할지 심사숙고 중이다. 시집이라는 이랑에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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