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이제 막바지에 접어든 것 같다. 올 장마는 지난달 중순에 시작하여 한 달 하고도 보름 동안 계속되었다. 물론 그동안 줄곧 비가 온 건 아니지만, 내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을 만큼 기간이 길었고 강우 일수도 많았다. 일부러 좀 늦게 파종한 콩과 참깨가 웃자람이 걱정될 정도로 많이 자랐고, 고구마도 잎이 너무 무성하다. 들깨밭은 물빠짐이 좋지 않아 성장이 더디거나 병이 들어 잎이 누렇게 변한 포기도 많이 생겼다. 옥수수는 다행히 며칠 전에 수확을 끝냈다. 몇 차례 삶아 먹었는데, 지금까지 먹어 본 것 중에 가장 맛이 좋은 찰옥수수였다. 같은 옥수수로 이모작이 가능한지 알아 보려고 대를 베어 낸 이랑에다 옥수수를 다시 파종해 두었다. 긴 장마는 무엇보다 밭이랑과 둑에 잡초를 엄청 무성하게 키워 놓았다. 잡초를 뽑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서 날이 개면 예초기로 대강 베고 말 생각이다. 모레까지는 비가 더 오겠다는 예보다.
혹서기를 그다지 덥지 않게 보낸 것 말고도 긴 장마가 유리할 때가 있다. 한 달쯤 전에 아내가 쑥떡을 하러 멀리 대명동까지 방앗간에 갈때 쑥 보따리를 싣고 차를 운전하여 나도 함께 갔었는데, 거기서 뿌리도 거의 없이 곁줄기를 떼어 얻어 온 '미스김' 라일락이 장마 덕분에 뿌리를 잘 내릴 것 같다. 그리고 텃밭 가에서 가지 몇 개를 잘라 꺾꽂이를 해 둔 흰배롱나무와 가시없는 꾸지뽕나무가 잎이 시들 틈도 없이 뿌리를 잘 내리고 있을 것이다. 건조한 봄철보다는 장마철이 꺾꽂이의 적기라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할 이야기가 있다. 지지난해에 나는 마당 한쪽에다 배롱나무 꺾꽂이를 예닐곱 포기 했었다. 보라색, 흰색, 주홍색 꽃을 각각 피우는 나무의 곁가지로 한 것인데, 그중에 흰 꽃을 피우는 나무만 죽었고 다른 두 색깔의 나무는 뿌리를 내려 잘 자랐다. 꺾꽂이에도 성공율이란 것이 있어서 모두 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배롱나무를 지난봄에 산소 옆에다 두어 포기 옮겨심고, 나머지 네 포기는 마을 앞 길가에다 심었다. 비록 몇 가구 밖에 없는 쓸쓸한 마을이지만 배롱나무라도 몇 그루 서서 화사한 꽃을 피우면 풍경이 근사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잡초를 뽑고 거름을 주고 가지치기도 하면서 정성을 쏟고 있었다. 그런데 내 허리 높이 만큼 자란 그 나무 두 그루가 며칠 전에 감쪽같이 뽑혀져 사라지고 말았다. 허탈하고 괘씸한 생각이 들었으나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 뽑아 갔을 테니 어디선들 잘 자라기만 하면 되지 않겠나. 스스로 위로를 했다.
그러고 나서 3일만이다. 오늘 산가에 와서 우산을 쓰고 텃밭을 둘러보러 나가는데, 아니 이럴 수가!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사라졌던 배롱나무가 그 자리에 다시 서 있었던 것이다. 30m쯤 떨어진 다른 곳에도 역시 나무가 돌아와 있었다. 뿌리가 일부 드러나 있을 정도로 제대로 심어져 있지 않아서 나는 비를 맞으며 다시 심었다. 한 그루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고 다른 한 그루는 보라색 꽃이 몇 송이 피어 있었다. 나는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나무가 흔치 않는 보라색 꽃을 피우자 그것을 키우면 들킬까 싶어서 도로 갖다 놓았을까? 꽃 색깔이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일까? 애초에 맘씨가 고운 꽃나무 도둑이다 보니 양심은 남아 있어서? 자라는 꽃나무를 볼 때마다 두고두고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굳이 자기 울타리 안이 아니더라도 이 길을 다니며 꽃을 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을까?
아무튼 배롱나무가 돌아와서 반가웠고, 돌려준 그분이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다. 누구인지 알게 된다면 꺾꽂이 해 둔 다른 나무들을 그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아직 장마가 끝나지 않았으므로 돌아온 배롱나무는 다시 뿌리를 열심히 내릴 것이다.
※ 8월 12일 현재까지도 장마는 끝나지 않아서 중부지방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다. 최근 며칠 동안에는 폭우까지 내려 전국에 1,000여건의 산사태가 발생하고 강이 범람하여(섬진강, 낙동강) 많은 인명(42명)과 가축이 피해를 입었다. 농경지 유실, 가옥과 자동차의 침수 등으로 인한 재산 손실도 엄청나다. '기후의 위기'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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