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일기

봉무동에서

공산(空山) 2019. 1. 20. 20:51

봉무동은 어릴 적에 부모님을 따라 해안장(지금의 불로5일장)이나 검단동의 외갓집에 가기 위해 털털거리는 버스를 타고 가끔 지나다니기만 하던 곳이다. 고등학교 적 하루는 단풍철에 팔공산에서 나오는 버스가 만원이라 타지 못하고, 쌀 한 말을 칡덩굴 멜빵으로 짊어진 채 불로동까지 40리 길을 걷던 지루한 들판길이었다. 가파른 산등성이에 지는 해만 보다가 들판 너머로 떨어지는 해를 볼 수 있던 먼 대처였다. 지금은 그 넓던 들판에 '이시아 폴리스'라는 신 시가지가 들어서고, 고층 아파트들이 대로의 양쪽에 즐비하다. 날씨가 추워진 지난해 11월부터 이곳 봉무동에 살게 되었는데, 옛날부터 궁금했던 이곳 언저리를 아내와 함께 기웃거리며 둘러보고 있다.
 
고라니가 많은 금호강 바닥길을 따라 동촌 유원지까지 걸어보기도 하고, 강둑 끝의 위남마을 뒷산을 거쳐 금호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가람봉에 올랐다가 무태까지 가서 되돌아 걸어오기도 하였다. 지묘동까지 걸어가서 하루는 왕산(247m), 또 하루는 응해산(526m), 또 하루는 응봉(456m)을 올라보기도 하였다. 다음에 올라 볼 공산과 함께 이 산들은, 팔공산에서 나오다가 미곡이나 미대마을 앞 신작로에서 바라보면, 지고 있는 붉고 둥근 해를 계절에 따라 각각 그 비탈에 굴리는 것처럼 보이는 곳들이다. 그리고 어릴 적에 늘 궁금했던 동쪽 산자락의 무덤들(불로 고분군)도 둘러보고, 단산지 둘레 길을 걷고 구절송 전망대에도 몇 번이나 올라보았다. 동쪽 들판 끝에 보이던 여러 개의 동굴이 일제 강점기에 강제노동으로 뚫은 군사용이었다는 것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오늘은 다시 아내와 함께 봉무동에서 버스를 타고 좀더 고향에 가까운 쪽으로 가서 등산을 하기로 하였다. 옆으로 지나다니면서도 이번에 지도를 찾아보기 전에는 이름을 몰랐던  '부남교' 앞에서 버스를 내렸다. 이 작고 낯익은 다리를 건너 몇 년 전에 조성되었다는 '왕건길'로 접어들었다. 마을 뒤쪽 등성이를 타고 20분쯤 오솔길을 오르자 '하늘마루'라고 이름 붙여진 완만하고 긴 등성이 길이 나왔고 좀더 오르면 520m 높이의 '거저산'이 거기 있었다. 이 산도 물론 팔공산 자락에 딸린 산이다. 고향집에서 바라보면 해와 달이 지던 곳이 바로 이 산자락인데,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옛날부터 좋아했다.
 
나는 돌아가리라 저 푸른 숲으로
이슬 젖은 풀 위에 누워 산허리의 달을 보면
그리운 모습들 비춰 주리라
내 까만 눈동자에 비춰 주리라
― 양희은의 '가난한 마음' 노랫말의 일부
 
거저산에서 서쪽으로 점점 낮아지는 등성이를 타고 '하늘다리'길을 지나 계속 내려가니 얼마 전에 응해산을 오를 때 와 보았던 '열재'가 나왔다. 산적들 때문에 열 사람 이상이 모여야 넘을 수 있었다는 고개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땐 파계사가 있는 서촌에서 이 고개를 넘어 북촌까지 학교에 다닌 친구들이 많았었는데, 시오리 나의 학교 길 보다도 더 멀고 험한 이 길을 다니느라 그들은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열재를 지나 '왕건 전망대'에서 팔공산 주능선을 바라보았다. 오른쪽부터 초례봉, 환성산, 관봉(갓바위), 삿갓봉, 신녕봉, 염불봉, 동봉(미타봉), 비로봉, 서봉(삼성봉), 오도재, 가마바위봉, 마당재, 물부리(물불봉), 파계봉
 
송나라의 소식(蘇軾)은 그의 시 '제서림벽(題西林壁)'에서 여산(廬山)의 진면목(眞面目)을 알 수 없는 것은 자신이 그 산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었다. 고향산천도 때로는 이렇게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실골과 신숭겸 장군의 사당을 지나 봉무동까지, 오늘 걸은 시간은 3시간 반에 걸음 수는 2만보였다.

 

1. 10. 내동 뒤 열재에 있는 안내 표지석

 

1. 10. 응해산에서
1. 16. 응봉에서 바라본 팔공산

 

1. 20. 거저산 '하늘마루'에서
1. 21. 구절송 전망대에서

 

 

2. 6. 공산에 올라 바라본 금호강과 팔공산. 이날도 봉무동에서 공산까지 왕복 3시간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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