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일기

사토(莎土)

공산(空山) 2018. 5. 21. 23:03

부모님 산소에 잘 자라 푸르던 잔디가 근년에 와서 점점 말라 황폐해져 갔다. 처음에는 가뭄 탓이라고 생각해서 수시로 물을 주곤 했지만 소용없이 잔디가 사라진 면적이 늘어만 갔다. 산소 뒤쪽에서 솔잎이 바람에 날려 와 쌓이는 곳과 거기서 빗물이 흘러내리는 곳을 따라 잔디가 죽는 것으로 보아 솔잎에서 녹아 나오는 왁스 성분이 잔디를 죽게 하는 큰 원인인 것 같았다. 거기다가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10년과 7년) 토양의 산성화와 영양 결핍도 한 몫을 한 것 같았다. 그래서 지난해부터는 솔잎을 몇 번 갈퀴로 걷어내었고, 토양 개선제인 석회고토 비료를 뿌렸다. 잔디를 다시 부분적으로 이식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다른 곳의 흙을 파와서 잔디 위에다 엷게 덮었다.

 

그리고 작년 가을에 밭에서 캐어다 심은 배롱나무가 봄이 되어도 잎을 내지 않아 뽑아 버리고, 20 전에 내 키만 한 다른 배롱나무를 캐어다 그 자리에 다시 심었는데, 이젠 사름을 하여 잎이 제법 돋았다. 이왕이면 흰 꽃을 피우는 나무를 심고 싶었는데, 붉은 꽃을 피우던 나무와 위치가 헷갈려 분간을 못하겠다.(이 나무들은 내가 수삼 년 전에 꺾꽂이를 해서 키워온 것들이다.) 꽃이 피어야 알 수 있겠지만 붉은 꽃이면 어떠랴. 작년에 심은 배롱나무가 죽은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몇 가지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첫째, 밭가의 돌 틈에서 서둘러 캐느라 뿌리가 많이 손상되었었고, 둘째, 늦은 가을에 심어 이식 적기에 맞지 않았고, 셋째, 찰흙인 붉은 황토에 심어서 통기나 물 빠짐이 좋지 않았다. 나무가 활착하는 데에 나쁜 조건은 다 갖추어졌던 셈이다. 그래서 올봄엔 배롱나무를 캐어낼 때 뿌리가 많이 손상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고, 심을 자리도 황토를 많이 파내어 버리고 부드러운 마사토를 실어 날라서 심었다.

 

여담이지만, 나는 이번에 산소에서 300m쯤 떨어진 산자락의 마사토를 파 손수레로 한 열 수레쯤 실어 나르면서 새삼 바퀴의 고마움에 대해 생각했다. 바퀴는 기원전 55천 년쯤에 메소포타미아나 중앙 유럽 지역에서 발명되었고, 기원전 22천 년쯤엔 바큇살이 달린 본격적인 바퀴가 나타났다고 한다. 아메리카(잉카, 아즈텍, 마야 등)의 원주민들도 일찍이 바퀴를 갖고 있었지만 수레를 끌만한 가축이 없어 실생활에 사용할 줄 모르고, 침략자들과 함께 신문물이 들어온 16세기가 될 때까지 그것을 장난감으로만 쓰고 있었다니, 어이없고 안타깝다. 그 옛날, 아버지와 내가 바퀴를 몰랐던 건 아니지만, 수레가 다닐 만한 길이 없어 지게에 온갖 무거운 것들을 얹어 지고, 엄마는 머리에 이고, 가파르고 좁은 산길을 오르내리던 것과 사정은 다르지만 그들과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 그 원주민들도 지금의 나처럼 외바퀴 손수레라도 좀 끌 줄 알았더라면 훨씬 수월했을 텐데.

 

아무튼, 오늘은 그동안 틈틈이 해온 사토 작업을 마무리했다. 파란 잔디 위에서, 화사하게 꽃을 피운 배롱나무 그늘 밑에서, 부모님께 약주 한잔 올리며 하나 뿐인 이 불초소생도 한잔 마실 수 있게 될 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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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가 사름을 잘하여 새로 난 가지에 꽃을 많이 맺었다. 지난 장마 잎에 흰가루병이 많이 번졌지만, 비가 그칠 때마다 살균제를 세 번 뿌렸더니 거의 치료가 되었다. 무슨 색깔의 꽃을 피울지 궁금하여 이틀이 멀다하고 산소에 올라가 보았는데, 드디어 오늘 첫 꽃이 피었다. 자줏빛이 섞인 분홍. 이 꽃의 빛깔은 주위의 푸른 산과 숲에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 봄엔 마당 한 쪽에 빨강, 보라, 하양, 색깔별로 새로 꺾꽂이해서 키우고 있는 배롱나무 중에 흰꽃을 피우는 나무도 한 그루 옮겨다 심어야겠다. 상석 앞엔 원추리꽃이 만발했다.

 

 

 

7. 25.
7. 29.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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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놀라운 일이 있다. 지난봄에 싹을 내지 않아 뽑아 버렸다고 했던 그 배롱나무가 뒤늦게 자기 발등에다 싹을 키우고 있는 것을 오늘 발견했다. 당시에 나는 그 나무를 뽑아 던져 버렸다가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산소 뒤쪽 두둑 너머에 다시 심어 두었지만, 싹을 내밀 기미가 없어 포기하고 그동안 물도 한번 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 뜨거운 여름의 긴 가뭄을 지나, 말라 죽은 줄기의 아래쪽 뿌리 부근에 이제서야 몇 개의 싹을 내민 것이다. 죽었다고 다시 뽑아 버리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고, 나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 나무는 밭가에서 흰 꽃을 피우던 나무이므로, 이 자리에서 잘 가꾸면 앞쪽의 붉은 꽃을 피우는 나무와 잘 어울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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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후 2019년에는 배롱나무가 꽃은 많이 맺었지만 개화가 늦었다.(2019. 8. 5.)
2019. 8. 11. 만개한 모습

 

2020. 8. 6. 유난히 긴 장마 막바지에 꽃이 만개했다. 성능이 향상된 새 폰 카메라로 촬영해 보았다.(16백만 --> 48백만 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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