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일기

텃밭에서 새를 쫓아 주는 구렁이

공산(空山) 2018. 6. 20. 16:22

작년엔 굵고 때깔이 좋은 첫물 고추를 새들에게 다 잃었었다. 고추가 붉게 익기 시작하자 어떻게 알았는지 까마귀와 꿩이 몰려와서 씨를 빼먹으려고 고추 옆구리를 쪼아 길게 구멍을 내었고, 그 고추는 이내 썩어 버렸던 것이다. 이웃 밭 주인 부부는 부랴부랴 넓은 그물을 사 와서 고추밭 전체를 덮어씌워 새들을 막았지만, 게으른 나는 더운 날씨에 여러 개의 말목을 세우고 그물을 씌운다는 것이 너무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그물을 씌워 놓으면 그 밑으로 다니면서 고추 따기에도 불편할 것 같아, 다른 방법을 써보기로 했었다.

 

헌 플라스틱 주름호스를 1.5~2m 정도의 길이로 여러 개 잘라 고추나무 밑에 씌워진 비닐에 양 끝을 박아놓는 방법이었다. 자타가 인정하듯이 새의 천적은 뱀이다. 그 뱀이 땅 속에서 기어 나와 대가리를 비닐 속에 감추고 있는 모습을 이랑에다 드문드문 연출해 두는 것이었다.

 

새가 뱀을 보면 두려운 맘이 드는 것은 본능일 테고, 그것이 본능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신세대 새들은 뱀을 직접 본 경험이 없을 테니 대가리를 감추고 있는 이것이 가짜라는 것은 눈치채기가 어려울 것이었다. 그리고, 한 번 보고 기겁하여 도망간 새는 다시 와서 자세히 관찰할 만큼 간이 크지도 않을 뿐더러, 설령 가짜라는 의심이 들더라도 그런 미심쩍고 꺼림칙한 분위기에선 입맛을 잃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나의 생각은 적중하여 그 후로는 새들이 오지 않았다. 이미 먼저 익은 많은 고추를 잃은 뒤였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런 심각한 피해는 없었는데, 해가 갈수록 새나 산짐승들의 개체수가 늘어나기 때문인지 피해가 커지고 있다. 땅콩은 그물을 씌웠는데도 정체 모를 야행성 짐승이 와서 가꾼 사람의 몫을 남겨두지 않고 이태 연속으로 싹쓸이해 갔다. 너구리, 족제비, 수달 등을 의심해 볼 수 있지만, 한 번도 현장에서 맞닥뜨려본 적이 없고 그들의 식성이나 습성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나로선 누구 하나를 지목할 수가 없다. 지목한다 해도 퇴치할 뾰족한 방법이 있을까마는. 그런데 육식을 좋아하는 족제비와 수달은 아무래도 범인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식물 뿌리를 좋아한다는 '뉴트리아'의 혐의가 더 짙어 보이지만, 설마 그 번식력 좋다는 외래종 설치류가 벌써 개울을 따라 이 산골까지 영역을 넓혀 왔을지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어쨌든 올봄엔 땅콩 심는 것은 아예 포기했고, 옥수수*, 맛이나 보려고 밭이 아닌 집 뒤안에다 감추듯이 조금 심어두었다.

 

아이디어는 자꾸 진보하기 마련이다. 올해는 그 주름호스에다 얼룩덜룩하게 은색 페인트까지 뿌렸더니 대가리와 꼬리 부분만 감춘다면 영락없는 구렁이다. 아직 고추가 익을 때는 멀어서 우선 흰콩을 파종한 곳에다 이 뱀을 한 마리 풀어놓았다. 콩은 싹이 제법 자라도 비둘기가 떡잎을 따먹으면 모종으로 못 쓰게 되는 것이다. 비둘기 서너 마리가 아침나절 내내 전깃줄에 앉아 내려다보며 침만 삼키고 있더니, 뱀이 자리 뜰 기미를 보이지 않자 결국 어디론가 날아가고 말았다.

 

 

 

 

2021. 8. 16. 익은 고추를 몇 차례 땄지만 올해도 새는 오지 않았다.

 

 

* 옥수수 대를 분질러 옥수수를 까먹는 짐승은 고라니가 아니었다. 고라니는 주로 고구마, 콩, 고추, 비트, 당근 등의 잎사귀만 뜯어먹는다. 고라니가 뛰어넘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1.5m 이상의 높이로 설치했는데도 그 울타리를 타고 올라가서 넘은 다음 옥수수 대에 기어올라가 매달려서 옥수수 대를 휘거나 분질러서 옥수수를 까먹는 짐승이 있었다. 그만한 크기와 무게라면 너구리나 뉴트리아 같은 중간 크기의 짐승이 아닐까 싶은데, 새가 아닌 이런 짐승들은 뱀이 천적이 아니기 때문에 가짜 구렁이로는 당연히 효과가 없다. (이 카테고리의「반갑지 않은 텃밭 손님」2022. 7. 23. 참조) 그래서 2023년도엔 옥수수 전체를 새(조류)그물로 덮어 씌우고 그물의 아랫부분은 철근 도막으로 눌러 두었더니 피해가 없었는데, 그물의 효과인지 짐승이 다른 곳으로 멀리 떠나고 없기 때문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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