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눈보라 - 황지우

공산(空山) 2015. 11. 17. 14:10

   눈보라
   황지우
 
 
   원효사 처마 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 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 소나무 숲을 상봉으로 데려가 버린다
 
   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 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 데, 아주 아주 추운 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뺨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게눈 속의 연꽃』문학과지성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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