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

『사물들과 철학하기 - 어떤 철학 경험』 중에서 - 공산

공산(功山) 2024. 10. 28. 17:38

   사발

   (...) 여기 최초의, 본래의 물건이 있다. 그 물건은 인간의 출현을 나타낸다. 다 자란 원숭이들은 몽둥이와 돌 등, 무기와 도구를 대신할 수 있는 것들을 가진다. 사발이 아니라. 오직 인류와 함께 공기, 호리병, 사발, 주발들이 태어난다.

   사발은 담는 역할을 개시한다. 근본적으로 사발은 안심하게 해준다. 이 용기는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끝없는 유출을 중단시킨다. 흩어짐을 막아 주는 것이다. 그것은 쏟아붓기를 중단시키고 유출을 멈추게 한다. 필연적으로 흘러나가 유실되도록 예정된 액체가 저장된다. 손보다 더 낫다. 지속적이고 힘도 들지 않는다.

   (...) 불가의 승려들이 다 버려도 보시 사발 한 그릇만은 지녔던 데에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거의 집을 대신하는 의미였다. (...)

   사발은 너무 약한 나머지 매우 강한 사물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것은 종말과 시작, 또는 끝의 사물인 것이다. 아이의 사발과 노인의 사발. 아침(차, 시리얼, 우유, 커피, 오트밀)의 사발과 저녁(수프, 국, 약탕)의 사발, 그것은 활발히 삶을 시작할 때, 그리고 활기가 약해지고 쇠할 때 함께 있다. 그 사이, 생활에 바쁜 당신은 그것을 제자리에 두고 잊어버릴 것이다.

   오늘 밤, 나는 단어들의 사발과 같은 책들을 꿈꾸며 잠든다.

 

   클립

   (...) 클립은 관심을 끌지 못하며, 보통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것들의 범주에 속한다. 이 때문에 나는 그것이 매우 좋다. 클립을 겉치레를 위한 물건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안은가! 그것은 시선을 끌려고 하지 않는다. 사실 주의를 끌지도 못한다. 그것이 꼭 필요한 물건이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봉사를 하며, 우리가 요구하는 일을 자신의 능력 안에서 끈기 있게 해준다. 합당하다. 훌륭하지는 않지만 합당한 물건이다. (...)

   특별히 감동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얼마 전에 나는 젊은 시절에 만든 옛 서류들을 찾아냈다. 그것들은 수년 전부터 시골의 습한 집에 있었다. 세월이 흘러 클립들은 녹이 슬어 있었다. 내가 빼내니까 그것들은 종이 위에, 그리고 거친 내 손가락들에 갈색의 오목한 흔적을 남긴다. 하지만 그것들의 쥐는 힘은 약해지지 않았다. 긴 세월과 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서 버티며 역할을 다했다.

   허세 부리거나 반항하지 않고 명예나 무모한 영웅심으로 인한 음모를 꾸미면서 고민하지 않으며(클립들의 폭동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늘에서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모습에서, 평범하면서도 유용하고 충실하며 신중한 클립은 윤리의 한 얼굴이다.

 

   리모컨

   (...) 사물들이란 우리의 생각에 의해 변형되지 않는 것들이다. 이것은 최소한의 정의겠지만 그래도 수긍할 만하다. 즉 우리의 의지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 실재들을 '사물들'이라고 부른다. 칸트는 이 사실을 알고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사유는 사물들에게 그 어떤 필연성도 강요하지 못한다." 실재는 자신을 변형시키려는 것에 우회적인 수단들과 과제를, 그리고 속박과 한계가 따르는 일련의 구체적인 행위들을 부과한다.

   리모컨은 이 모든 것을 파괴한다. 그것은 우리를 원하면 이루어지는 상상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게 얼마나 옳은지를 확인시켜 준다. (...)

   리모컨은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바로 그 자리에서 성공을 거둔다. 당신의 리모컨을 들어 보라. 주위 온도를 필요에 따라 내려 보기도 올려 보기도 하고, 날이 저물거나 밝게 하고, 다른 사람의 옷을 잽싸게 벗기거나 입히고, 벽장을 (식료품, 의류, 내의류, 악보, 비누와 향수들로) 가득 채우게 하라. 전세계의 평화에, 비참의 끝에, 총체적인 번영에, 상호 존중에, 지속 가능한 발전에, 존엄성에 해당하는 버튼들을 찾아보라. 영원한 삶에 해당하는 버튼을.

 

   침대

   (...) 내 차에서 내리거나 앉을 때, 나는 그것을 하나의 사물로 본다. 보도에 길게 서 있는 금속과 창 유리로 된 상자로 말이다. 그러나 운전을 하게 되면, 나는 곧 그것을 연장된 내 몸의 일부, 반응하여 움직이는 동그란 거품처럼 인식하게 된다. 사물에 대한 망각은 받쳐지고 지탱되고 수송되는 행위와 분명 관련 있는 듯하다. 기차는 플랫폼에서 보면 하나의 사물이다. 하지만 내가 승객이 되면 더 이상 그렇지 않다. (...)

   서 있거나 누워 있어도 우리는 동일한 세상에 살지 않는다. 누운 세계가 존재하고 선 세계가 존재하는데, 그 두 세계는 아주 약간의 공통점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앉은 세계가 있고, 무릎을 꿇은 세계, 웅크린 세계 등등이 존재한다. 각각의 세계는 서로 별 상관이 없다. 수직의 삶과 수평의 삶은 당연히 동종이 아니다. 침대에서는 공간과의 모든 관계가 변한다. 그렇다면 시간과의 관계는? 눕거나 서서도 동일한 확신을 가질까? 동일한 느낌을 갖게 될까? 같은 사유를 하게 될까?

   아무도 일방적이고 단호하게 '그렇다' 또는 '아니다'로 대답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우리는 세계의 연속성과 유일성을 철석같이 믿는다. 그래도 보통 당신이 일하는 곳에서 가능하다면 바닥에 길게 누워 천장을 응시하고 지면을 바라보라. 정말로 당신이 관찰하는 것이 '동일한' 세계인가? (...) 침대 혹은 바닥 위에 누워서 보는 세계와 서서 보는 세계는 서로 연결될까? 어떤 방식으로? 두 세계를 연결하는 세계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믿음의 대상일까, 아니면 지각의 대상일까?

   요컨데 침대는 엄밀히 말해 우주선이다. 두 세계를 왕복하는.

 

   

   막 들어가려다 보니 출입문에 먼지가 보인다.(...) 아주 적은 양이지만 쇠시리의 테두리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먼지가 뚜렷이 보인다. 문에, 특히 출입문에 먼지가 끼여 있을 땐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은지 모르겠다.(...)

   빈 동시에 가득 찬 문은 이중적인 사물이다. 경계를 정하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는 사물. 보호하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고 받아들이지 않기도 한다. 그것은 동시에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 문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는 정신적인 여정도 없다. 문과 관련된 표상은 여러 신화와 의식들 속에, 그리고 구원과 해방의 표현뿐만이 아니라 멸망의 표현 속에 편재한다. 문은 앞에 있는 것과 뒤에 있는 것을 결합하기도, 분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은 두 측면에 모두 속하기며, 결코 한 측면에만 속하지 않는다.

   나는 문을 밀 때면, 세계를 바꾸는 듯한 느낌을 종종 받는다. 다른 쪽의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단어들은 전과 같이 울리지 않고, 몸짓도 전과 같지 않다. 곧 몸과 생각들 전체를 다른 식으로 준비해야 한다. 실재로 빈번하게 그런 경우가 생긴다. 문의 먼지를 제거해야 하는 게 이 때문일까? 모호하게, 깨끗한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샌들

   (...) 우선 바위 위를 거닐어 이미 닳아 해지고 가죽이 벗겨진 지난 여름의 샌들을 정리하면서, 벌어지고 손처럼 평평한 이 가죽과 다른 평범한 신발들을 구별해 놓는 차이점에 대해 나는 갑자기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훌륭한 논술 주제가 될 만하다. 예를 들면 "샌들은 신발인가?"라는 제목에 네 시간을 주고서 말이다.

   (...) 특히 샌들은 중개의 교훈을 준다는 점을 대부분이 파악하지 못했다. 샌들은 매개와 경계면에 대해 가르쳐 준다. 즉 그것은 자연과 문명의 접합부에서 발과 지면을 가르는 동시에 결합한다. 그것은 세계들의 경계를, 다시 말해 여러 세계의 공존을 가능케 하고 서로 맞붙이는 막을 구체화한다. 우리가 샌들을 피부와 지면 사이에서뿐만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수공과 기계공업, 동과 서, 남과 북, 냉온 사이에서 만난다는 점을 언급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전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움직임 · 가벼움 · 바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샌들이 세계의 접합점이라는 의견을 어째서 제시하지 못할까?

 

   포크

   (...) 어쩌면 내가 바로 이 순간 이 세상에서 포크라는 존재에 주의를 집중하려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정으로 인해 나의 책임이 커진다. 만약에 실패한다면?(...) 내가 이 척박한 자리를 취하는 유일한 사람인 한 인류 전체의 실패가 아니겠는가?(...)

   나는 포크라는 종의 명예가 침몰하도록 그냥 두지 않겠다. 비교 포크론의 발단을 제시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실제로 반(反)사발인 점 말고, 포크란 무엇인가? 사발이 오목하고 안정된 대신에 포크는 뾰족하고 날카롭다. 사발은 보호하고 포크는 공격한다. 사발은 보전하고, 포크는 꿰뚫는다. 첫번째, 사발은 옛스럽고 흙냄새가 난다. 최근의 것인 포크는  현대적이고 금속성이다. 고대인의 사발, 현대인의 포크. 분명 포크는 멀리 말뚝이나 창, 불에 단련한 끝이 뾰족한 물건들로부터 유래하지만, 포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도기 제조인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또 하나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 특히 특수한 사회적 변화 유형을 요한다.(...)

   어쨌든 포크는 근대 과학과 예절과 거의 동시에 탄생하였고 퍼졌다. 그것은 잔인성이라는 하나의 형태에서 나오는 세 가지 양상과 관련 있을지 모른다. 먹을 것과 거리 두기. 세계에 대한 수학적인 처리.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 대한 관례적 중립화. 이에 대한 방증을 들자면, 포크가 없는 민족들에는 하나같이 정밀과학과 위선이 없다. (...)

 

   세탁기

   (...) 세탁기는 우주적인 산물이다. 우리는 그 안에다 죽은 영혼들을 쑤셔넣는다. 전부 다 돌아간다. 물이 과거, 흔적, 기억을 실어간다. 계속 쏟아지는 물이 섬유 속으로 들어가고, 이전의 시간들을 씻어낸다. 그것은 가장 내밀한 얼룩을 용해한다. 고대 양식과 함께 순환하면서 미래가 형성된다. 이전의 것들 모두가 완전히 배어나오면 문이 열리고, 둥근 유리창은 금방 마르고 새로운 삶을 위해 준비된 깨끗한 영혼들을 내보낸다. 당연히 그것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새것처럼, 그리고 다시 더러워질 준비가 되어 있다.

   세탁기란 신비 의식의 마지막 잔존물일까? 입문, 죽음과 부활, 삼라만상의 일들. 즉 언제나 씻기, 닦기, 물에 담그기, 돌리기의 순환이다. 오늘날 가정의 의식도 이와 같을 것이다.

 

   묘석

   (...) 나는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거나 시각을 뒤집으면, 다시 말해 오직 사물들만이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 이름과 날짜를 끈질기고 지속적으로 기억하는 반면에, 우리들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하고 곧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지 자문해 본다. 여기서 더 나아가 본다. 어쩌면 모든 사물들에는 우리의 목덜미 뒤의 존재로서의 죽음, 또 다른 측면, 이면, 즉 뒷면이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오직 사물들만이 미덕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오직 그것들만이 법을 지킨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거의 못 미치지만, 때때로 우리는 나름대로 힘껏 따라가려고 애쓸 뿐이다.(...)

   (...) 내가 서정적 감흥과 상상력에 빠져 너무 쉽게 흥분한 듯하다. 사물들 아래에는 오직 또 다른 사물들이 있을 뿐이다. 묘석 아래 관과 유골들이 있으며,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염려하고 모사를 꾸밀 일이 전혀 없다. 사물 아래 사물들이 있을 뿐이다. 구름이 몰려온다.

 

   쓰레기통

   (...) 내가 그것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다음날 몇 초만에 그것을 찢어 요구르트만을 꺼내 먹고는 버렸다.

   이것과 같이 우리가 보이지 않는 다른 면에 대한 생각 없이 버리는 사물들이 날마다 무수히 많다. 사물들은 오직 무로부터 나와 그곳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무엇이었든 조금의 눈길도 끌지 못한 채. 이제는 내가 눈물을 흘리며 연민에 빠진다. 어째서 이 연민은 피하기 어려운 것일까? 피하고 싶은데도. 아마 동일한 것이 우리를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들과 같은 것, 즉 피할 수 없고 결정적이며 명예도 없는 혼란과 악취, 봉지 밑바닥으로의 사라짐 말이다. 더구나 개인이나 유기체로서의 우리들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작품, 우리들의 집단 · 사회 · 문화 ·  · 희망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언젠가 쓰레기통으로 사라진다. 쓰레기통이 세계의 미래라는 사실을 오늘 저녁에야 깨달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내가 그러한 이상한 생각을 어떻게 해냈는지 모르겠다. 정말로 내가 어떻게 견디어 내는지 모르겠다. 이 오물 봉지가 점점 더 무겁게 느껴진다.

 

   외바퀴 손수레

   (...) 평온을 되찾기 위한 시도로서 나는 주말에 시간을 내어 시골에 왔다.

   정원이 있었지. 흙은 아직 질퍽해서 축축하고 틈이 없다. 파종기는 멀었지만, 흙을 고르고 구멍을 메우고 화단을 새로 꾸미기에 좋은 시기다. 나는 창고에서 외바퀴 손수레를 꺼낸다. 아버지께서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막 딴 호두 열매와 시큼한 사과와 호두들을 나르던, 내 어린 시절에 보았던 가장자리가 넓고 바퀴에 철테가 둘러진 나무 수레는 아니다. 바퀴에는 고무 타이어가 끼워져 있고, 바보처럼 입이 벌어지고 금속으로 된 녹색의 편리한 공업 제품이다.

   나는 그것에게 변함없는 호감을 느낀다. 한편 외바퀴 손수레를 향한 사람들의 감정에 대해서는 연구가 충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힘을 변형하는 지렛대와 도르래와 같은 유형의 간단한 기계인 그것이, 인간에게 감사의 마음을 유발할까? 그것들은 변형과 분할 · 연기에 의해 최소한의 힘으로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외바퀴 손수레에는 그럴 만한 것이 있다. 아니 그 이상이 있다. 바퀴 말이다. 역사를 바꾸고 세계의 모습을 변화시킨 완벽하면서도 간단한 천재적인 발명품. 외바퀴 손수레에서 짐의 무게를 윤심에 지우는 완벽함에 나는 경탄한다. 운반해야 하는 흙의 무게가 뻗은 팔과 다리로 느껴질 때, 운전하는 게 바퀴인지 발인지 혹은 사물인지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될 때, 굴러가는 수레의 앞뒤, 좌우의 가벼운 흔들림이 나는 좋다.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부담스러운 흙의 무게를 나는 즐기고, 또 그것에 놀란다.

   갑자기 풍경이 위아래로 움직인다. 이제 외바퀴 손수레는 조용한 정원에 있지 않다.(...) 겨우 가죽만 남은 수천의 뼈 무더기와 수레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던 머리 하나 또는 팔 하나가 외바퀴 손수레에 실려 옮겨져 아래로 뒤섞여 던져졌을 때, 나의 부모들은 성년이 다 되었었다. 그 일들이 역사에 의해 바로잡아진다.(...)

 

   자동차

   (...) 놓여진 자리에서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사물들은 이동하고 옮겨지기 위해 살아 있는 어떤 힘을 기다렸다. 무력했고, 최소한의 움직임도 없었다. 둔중하고 변함없으며 빽빽하고 영원히 자기 자신만 돌아보고 있었다. 그것들은 경우에 따라서 자극을 받을 수 있었고, 물에 떠밀리거나 덩치 큰 짐승에 의해 당겨질 수 있었다. 결코 그것들 스스로는 움직일 수 없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세계를 바꾸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사물들을 출현시킨 것이다.(...)

   나는 자동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고 나아간다. 굴러가는 사물 속에 내가 앉아 있고, 사람으로서 그 사물 안에서 그것을 조종한다는 사실에 대해 확실한 생각이 없는 채로. 우리 몸속의 영혼이  배 안에 조종사처럼 있는 게 아니라 그것과 완전히 혼합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운전자는 그 자신이 자동차라는 사물이 된다.

   이제 자동차는 그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몸의 분신, 동작의 확장이다. 그것은 힘을 주는 옷이며, 속도를 내는 외관이다. 몸과 사물의 경계는 아주 모호하고 위치를 정하기 어려워진다. "뒷길에 세워두었어"라고 식당에 앉은 그가 말한다. 그는 어디에 있는가? 의자 위인가, 뒷길인가? 그의 몸은 여기에 있는가, 아니면 저기에 있는가? 바로 그 사람이면서 전혀 모르겠다고 한다. 그의 몸은 떠돈다. 우리들 모두의 몸이 떠돈다.(...)

 

   여행 가방

   (...) 가방을 꾸린다. 많은 사람들을 번민하게 하는 일이지만, 나는 이 일에서 매력적이고 안심시키는 어떤 것을 본다. 나에게 방랑벽이 있거나, 아니면 내가 너무 앉아서 생활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 가방을 보기만 해도 나는 우선 기쁘기부터 한다. 떠나기 위해서든 돌아오기 위해서든 언제나 이동하는 일은 좋다. 무엇보다도 여행 가방은 합리적인 물건이다. 사각형에 튼튼한 그것은 인간의 현실적인 필수품에 대해 미니멀 아트의 시각을 요한다. 움직이는 작은 집을 손으로 들거나 옆에서 민다는 사실에서 여행가방은 우리를 안심시킨다. 전부 다 담기란 불가능하다.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 선택권은 가방의 한도 내에서 가방에게 부여된다. 개성의 발휘. 최소한의 공간에서의 최대한의 가능성. 간결함과 효율성. 일시적이지만 본질, 정말 필요한 것으로 돌아온 삶의 간소함. 그래도 몸짓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약간의 무용한 것들을 곁들인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알 수 없지 않은가. 모험을 하게 될지. 예정대로 진행될지.

   (...) 이미지가 불쑥 떠오르고, 몸이 오싹해진다. 수십, 수백, 수천, 수만, 수십만의 여자들과 남자들 · 아이들이 각자 하나씩의 자기 가방을 들고 있다. 그리 오래전의 일도 아니다. 그 사람들은 내 부모님들 연배이다. 그들은 기차를 탄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의 가방들이 뒤얽혀 쌓여서 언덕을 이룬다. 그들은 살해되고 불살라져서 재만 남는다. 아무 말도 없다. 비교할 것도, 그럴 필요도 없다. 어쨌든 그 이후로도 들판은 끝없이 펼쳐진다. 당연하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텔레비전 수상기

   (...) 텔레비전은 온갖 색들이 다 까맣게 된다. 흐려지고 경직되며 최면에 걸린 의식이다. 완전히 무기력해진. 지나가는 모든 것을 꿈쩍도 않고 군말 없이 삼키는. 이미지들은 주의를 고정시키고 마비시키며 한쪽으로 모으고 흡수하며 두렵게 한다. 시선은 몽롱해지고, 몸은 식물처럼 고정되며, 사고는 정지된다.

   기분 나쁜 일은 아니다. 우리는 해야 할 것도, 달아날 것도 없이 '즉시' 상상의 일들을 지속적으로 주입받게 된다. 그것들은 미리 짜여진 편집과 장면 · 오려내기에 의해 내용이 결정되고 인도된다. 그것은 기분 나쁜 일이 아닌데, 바로 이 점에서 더 심각하기 때문에 반복해서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바로 여기에 텔레비전의 성공, 즉 오늘날 세계의 다른 어떤 통제 장치들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는 텔레비전의 성공의 열쇠가 있다. 우리는 이미 준비된 이미지들로 채워지도록 그대로 있어야 하는데, (...)

   텔레비전이 전세계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게 된 이래로 정치적인 혁명은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영영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텔레비전은 여타의 지배 · 억압 · 통제를 위한 수단들과는 다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선 훨씬 강력하고 효과적이다. 가정에서 자기 자신의 부재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거실 혹은 침실에서 전세계를 본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떠나고 없는 것은 바로 당신들이다.

 

   연마기

   이 집에서 나는 습관적으로 몇 가지 공사를 진행한다. 상황에 따라서 나는 배관공이나 소목장이 · 타일공 · 석공 · 정원사, 심지어는 기와공이 된다. 꽤 오래전 나의 집을 바닥에서부터 꼭대기까지 몇 년에 걸쳐 수리하면서 현장에서 조금씩 배웠던 것이다. 그 일들을 하면서 느끼는 기쁨은, 내가 진짜 지식인은 아님을 확신시켜 준다. 다행한 일이다.

   내 친구들 소유의 집에서 그들이 할 일을 내가 계속하는 것은,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나의 방식이기도 하다. 집을 관리하는 일은 마치 삶의 장소의 기관들을 보살피는 것처럼 언제나 감동적이다. 얼마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몇 군데에 흠집이 나고, 불쾌감을 주는 곳이 생긴다(잡동사니를 두는 곳, 잔해, 때, 작업장). 일종의 외과 치료나 붕대감기가 이루어진다. 이어서 이식을 받고 다 아물면, 집은 보다 살기 좋은 곳이 된다.(...)

   우툴두툴한 표면은 이제 끝났다. 이제는 윤을 내는 일이 중요하다. 평온하고 진정되며 밝아져서 선명해진 표면. 모든 것들을 위한 연마기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일까? 생각을 연마하고, 문장에 윤을 내고, 작품의 표면을 일률적으로 평평하게 할 수 있는 장치들이 바랄 만한 것일까? 나는 작은 떨림과 먼지, 새된 소리들을 견뎌낸 나머지 눈에 띄게 정신이 나가버린 듯하다. 그러한 기계들은 모두 오래전부터 존재한다.

 

   진공청소기

   (...) 그런데 집 안의 물건들 중에서 진공청소기만큼 생각할 거리를 주는 것도 거의 없다. 진공청소기는 확실하고 분명한 모든 것이 친구이다. 부스러기들이 모든 것을 흐리게 하고, 솜 같은 뭉치들이 희미하게 할 때 초강력 진공청소기가 표현의 공간을 되살린다. 게다가 청소기를 돌리고 싶지 않을 때는, 표현의 공간을 되살리려는 긍지가 강력한 지원이 되지 않을까? 물론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즉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라." 핵심이 되는 사항은 우리 모두가 빨려 들어갈 수 있고 모두 청소기의 끝과 호스로, 다시 말해 우주의 진공청소기인 거대한 봉지 속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을 누가 비울까? 먼지는 어디로 갈까? 호스 속에서 가끔 단추나 클립 · 핀들이 그렇듯이 그 먼지들이 금속성의 작은 땡그랑 소리들을 만들어 낼까?

   나의 생각은 멈추지 않고 돌아갈 듯하다. 차차 먼지와 함께 가벼운 사물들이 빨려 들어간다. 다음에는 중간 정도의 사물들이, 그 다음에는 무거운 사물들이. 세상이 사라진다. 점차 그 자리에는 멋진 공백이 드러난다. 자, 그렇다. 전 우주가 빨려 들어간다, 마침내 우리는 과거를 모두 지워 버렸다. 회전은 끝났다. 모두 사라졌다. 단지 몇 가지 질문들만 남는다. 즉 이것이 사실일까, 사실이 아닐까? 나는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 덧붙여서, 판매 후 서비스는 어떻게 될까? 형이상학적으로 모두 없어져서 시원하게 된 것일까?

 

   자전거

   집과 바다를 가르는 이 10여 킬로미터의 길을 나는 잘 안다. 마지막 농가와 모래 언덕을 우회하는 지그재그형 코스와 직선 도로, 그리고 평지 비슷한 길을 지나면 기슭으로 연결되는 완만하게 비탈진 언덕이 마지막으로 나온다. 이 길은 자전거를 타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나는 먼저 자전거를 수리하고 먼지를 털고 바퀴에 바람을 넣고 브레이크와 안장과 톱니바퀴의 기름을 확인한다. 자전거를 살필 때마다 나는 19세기를 생각하게 된다. 자전거는 그 시기에 속한다. 자전거가 그 이후에 완벽해졌다고 해도, 그것의 발상에는 배관과 강철 기술자의 흔적이 남아 있다. 기계공학과 평형의 조화. 정확한 계산과 단순한 효과. 자전거는 기차와 증기 기관과 철근 골조의 사촌이다. 그것은 언제나 조각술, 드라이포인트, 윤곽선 소묘에서 나온 사물, 사진 잡지에 나오는 흑백의 사물과 비슷하다. 불필요하게 세세하면서도 간소하고 압축된.

   자전거는 자신의 패를 숨기는 사물이다. 이 고철 조합은 직접 굴려 보기 전에는 전혀 움직이지 않을 듯한 인상을 준다. 잘못 배치된 듯. 막연하고 위험한 듯. 결론적으로 어설퍼 보인다. 그렇지만 3킬로미터만 달려 보면 완전히 다른 물건, 즉 하늘을 나는 듯 가볍고 더할나위없이 편안하게 일직선으로 미끄러지는 물건이라는 점을 느낄 수 있다. 자전거는 정지했을 때와 움직일 때 각각 다르게 존재한다. 움직일 때의 그것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사물이 아니다. 그것의 모든 특성들이 완전히 새로워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전거 속에는 악기가 있다. 다시 말해 사물과 사람의 만남 속에서,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 변동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은 움직임에 의해 균형이 잡히는 사물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넘어진다. 오직 앞으로 나아가면서만 균형이 유지되고, 이것은 존재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된다. 19세기의 다른 면모들을 보여 주는, 부잣집 아이들이 공원에서 가지고 놀던 굴렁쇠나 팽이와 같이 극소수의 물건들만이 이것과 상황이 비슷하다. 인간의 힘에 의해 조용히 구르고 늘 움직인다는 조건하에서만 작동하는 기계를 구상하고 만들며 보급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세기이며 과학에 대한 신뢰와 역사의 진보의 세기인 19세기가 요구된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자전거와 같이 앞으로 나아갈 때에만 지속될 수 있다.

   나는 바다로 향하는 내리막길에 앞서 평지 비슷한 길로 들어선다. 하늘은 유백색이고, 실제 기온은 따뜻하다. 어쩐지 편안한 느낌이 밀려온다.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나는 기어를 바꾸면서, 여기에 앎에 대한 교훈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설명이 가능한 게, 묘사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전달할 수 있는 것도 거의 없다. 설명서도 안내서도 없다. 단지 자전거의 운동과 지속성에 대한 일종의 믿음과, 몸 스스로 찾아내고 잊어버리지 않는 조절 방식만 있을 뿐. 그러한 앎은 전부이거나 무(無)이다. 그래서 자전거를 3분의 2만 혹은 반만 탈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지금 숨이 가빠지기 시작한다. 다행히 바다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이 아주 가깝다. 근육들이 당기고 심장은 벌렁거리지만 길을 한 번 보고 기수를 유지한 채 저절로 내려가도록 가만히 있으면 되는 순간이 나는 좋다. 하늘은 여전히 희고, 바람 한 점 없이 폭풍우를 기다리는 바다는 수평선까지 연한 잿빛이다. 자전거는 운동 중에서도 거의 부동의, 움직임이 없는 순수한 이동으로 소리없이 질주한다. 그것은 영영 끝나지 않으며, 나는 그렇게 무한정 영원으로 영원히 내려간다. 시간 속에서 빠져나가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단지 한순간 동안 시간상으로 그것은 단 몇 초, 혹은 단 몇 분의 일이다. 그러나 시간 밖의 순간은 본래 그 어떤 수로도 측정되지 않는다. 그것에는 길이가 없다. 바로 이런 식으로 인간은 영원에 접근한다. 자전거를 타고 시간을 빠져나가기란 늘 지속되는 게 아니라 가끔, 아주 드물게 할 수 있는 일이다.(전문)

 

   

   (...) 그래서 나는 내 책들이 어디에 있는지 거의 다 안다. 몇 년 간격으로 계속 옮기고, 또 여러 번 정리하기는 했지만(...) 나는 때때로 그 사라진 장서들이 존재한다는 환영을 가진다. 이것은 아마도 절단 수술을 받은 사람들이 느끼는 '환영지'와 많이 비슷할 듯싶다. 실제로 나는 그 모든 인격체들이 줄지어 있는 일련의 선반들과 책꽂이들과 '자아'라 불리는 것을 분명하게 구별하지 못한다. 나도 역시 어느 정도까지는 수직으로 늘어서 있는 그 종이들이다. 각각 그 나름의 형태와 윤곽과 역사를 지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그것들이 무수히 있든 없든 상관없다. 그렇게 사라지든, 늘 너무 많이 남아 있든...... 나도 역시 그것들 중의 하나니까.

   이런 이유로 나는 높이 쌓아놓은 그것들, 묶여서 한 곳에 뒤엉켜 쌓여 있는 책들을 정리할 때면 늘 내 머릿속을 정리하는 느낌이 든다.(...)

   늘 궁금한 사항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하면 아무 일 없게 책들을 나란히 둘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어떤 관점에서 책들에게 아무 일이 없는 게 당연하고 납득할 만하다. 종이와 접착제와 마분지에 불과하고 반란의 위엄도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격과 역사의 측면에서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책들과의 싸움을 특기하지 않는 것에 대해 나는 매우 놀랐다. 서로 대립하는 텍스트들이 바로 옆에 나란히 붙어 있는 경우가 빈번하다. 우리는 이른 아침에 망가진 책꽂이, 구겨진 책들, 그것들의 파편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다. 전혀 아무 일 없을 것이다. 이해하게 되겠지

 

   파리채

   (...) 파리채는 적어도 파리 박멸에 관한 한 쓸모가 없다. 그것의 용도는 파리를 죽이는 데 있지 않다. 일종의 항의 · 거부의 몸짓을 표현하는 데 있다. 분노를. 그것은 파리란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그것들의 윙윙거리는 소리는 부적합하다고 말한다. 그 곤충들은 성가시고 더럽고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그것들의 존재를 거부하고 쫓아야 한다고. 파리들과의 대화는 있을 수 없다고. 파리채는 가차없이 모두 납작하게 짓이겨지고 무자비하게 짓눌릴 것이라고 외치면서 파리들한테 가버리라고 몸짓한다.(...) 일이 잘 되는 경우도 있다. 파리채는 어쨌든 직접적으로는 유용한 물건이 아니다. 순수한 몸짓일 뿐, 그외의 다른 게 아니다.(...)

   그것은 전형적으로 철학적인 사물이다. 철학 역시 직접적인 유용성이나 결과가 없는 순수한 행위이며, 혼란의 부재와 고요에 도달하기 위한 책임과 운동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철학 행위는 그것이 제기하는 질문들에 의해서보다는 그것이 제외시키는 질문들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사실에 너무 주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적어도 나의 관점에서 한 철학자의 방식의 대부분은 질문들을 쫓아내고, 패주시키며, 단번에 물러나게 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철학자들을 지적인 이야기들에 관한 모든 부질없는 생각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이라고 상상하지 말기를. 그들은 무의미하고 성가시고 불쾌해 보이는 질문들은 난폭하게 거부한다.

   철학자들의 '질문을 쫓는 파리채'는 냉담한 폭력을 요한다. 어떤 문제나 세계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한 마디 말도 한 마디 변명도 없이 포기하기이고, 함정이 있는 질문들은 듣지 않기이며,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조차도 거부하기이다. 관심없는 일에는 영속적으로 완고하고 무디기까지 한 귀머거리가 되기, 최초의 시도에 대해 걱정 없이 나아가기, 이것들 또한 사고일까?

 

   그럼 당신은?

   경험이란 것은 그만둘 줄 알아야 한다. 경험은 무한히 지속될 수 있을 것이고, 사물들에 관한 이 일기도 끝없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만두겠다. 한없는 이야기들에는 종지부를 찍어야겠다. 당신들의 입장에서 다른 생각들을 이끌어낼, 틀림없이 나와는 다른 아니면 같은, 당신들에 맞는 사물들을 대상으로 당신들이 계속하기를.(...)

   이것들은 웃기는 이야기들이고 나는 아무 말이나 하며 말장난을 한다고 생각해도 당신들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옳다. 말 속에, 머릿속에 짧은 섬광이나 불똥 혹은 수면 위에 물수제비뜨기 같은 것들을 유발하는 일 외에는 사물들이 어떠한지 말할 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1년 전부터 터득해 왔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하겠다. 즉 사물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는  우리 자신과의 관계를 보여 준다고. 만일 사물들이 우리를 매료시키고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물들을 거부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 옆에 대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이 두 경우 사이에서 늘 사물들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고, 우리와 섞이며 자유롭다고 여겨지는 우리의 영역을 조금씩 침범하는 사물들을 볼 채비가 되어 있어야 좋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견딜 때에만 우리 자신의 '중심'에 있다.

   당신은 사물들이 어떠한지 알고 싶은가? 매우 간단하다. 그것들은 당신 자신이 지내는 상태와 같은 것이다. 모든 사물이 인간의 척도이다. 당신이 너무 닫히지도, 너무 불안정하지도 않기를. 당신의 사물들을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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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물들과 철학하기 - 어떤 철학 경험』 (로제-폴 드루아 지음, 박선주 옮김, 동문선 2005)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