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시

쉼보르스카의 「사진첩」 해설 - 권순진

공산(空山) 2019. 12. 20. 13:02

   사진첩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

 

 

   가족 중에서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한때 일어난 일은 그저 그뿐, 신화로 남겨질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로미오는 결핵으로 사망했고, 줄리엣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늙어빠진 노년이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아남았다.

   눈물로 얼룩진 편지에 답장이 없다는 이유로

   이승을 등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지막에는 코에 안경을 걸치고, 장미 꽃다발을 든

   평범한 이웃 남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정부의 남편이 갑자기 돌아와

   고풍스러운 옷장 안에서 질식해 죽는 일도 없다!

   구두끈과 만틸라, 스커트의 주름 장식이

   사진에 나오는 데 방해가 되는 일도 없다.

   아무도 영혼 속에 보스의 지옥을 품고 있지 않다!

   아무도 권총을 들고 정원으로 나가진 않는다!

   (어떤 이들은 두개골에 총알이 박혀 죽기도 했지만,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야전 병원의 들것 위에서 사망했다.)

   심지어 무도회가 끝난 뒤 피로로 눈자위가 거무스레해진

   저 황홀한 올림머리의 여인조차도

   네가 아닌 댄스 파트너를 좇아서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아무런 미련 없이.

   이 은판 사진이 탄생하기 전,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그 누군가라면 또 모를까.

   내가 아는 한 이 사진첩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슬픔이 웃음이 되어 터져 나올 때까지 하루하루 무심하게 세월은 흐르고,

   그렇게 위안을 얻은 그들은 결국 감기에 걸려 죽었다.

 

   --시선집 끝과 시작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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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출신 여성시인 쉼보르스카의 시는 늘 이렇듯 경쾌한 통찰과 다정한 반어적 지혜로 가득하다. 쉼보르스카는 현실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사랑, 증오와 갈등 사이를 특유의 감각을 동원해 유쾌하게 넘나든다. 먼저 어려운 낱말 정리부터 하자. ‘만틸라는 머리와 어깨를 덮는 넓은 여성용 스카프를 말하며 스페인이나 멕시코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아무도 영혼 속에 보스의 지옥을 품고 있지 않다!’ 이때 보스는 Boss가 아니라 살 떨리는 악마와 괴물 이미지로 유명한 네덜란드 태생의 화가 히로니무스 보스를 말한다.

 

사람들은 죽음보다 깊은 사랑을 말하지만 사실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거의 없다. 영원한 사랑의 고전이라 할 로미오와 줄리엣도 각기 다른 병에 걸려 사망했다. 사랑 때문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지만 대부분은 저급한 쇼에 불과했다. 사랑이 아름다운 시기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그 사랑이 진행될 동안 만이다. ‘정부의 남편이 갑자기 돌아와 고풍스러운 옷장 안에서 질식해 죽는 일이 만약에 있다면 그건 슬프고도 웃기는 사건이다. ‘무도회가 끝난 뒤 피로로 눈자위가 거무스레해진 저 황홀한 올림머리의 여인은 누구인가.

 

무슨 이유로 다른 댄스 파트너를 쫓아서 어디론가 떠나버렸을까. ‘아무런 미련 없이문득 저 '황홀한 올림머리 여인'에게서 한 여인의 초상과 또 한 여인의 그림자를 환기한다.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을 당긴 마리 앙투아네트. 잘 알려진 백성들이 빵(바게트)이 없으면 케이크(브리오슈)를 먹으면 되지라고 했다는 그녀의 말은 생감자를 코에 대고 쿵쿵 냄새를 맡는다든지, ‘구명조끼를 입었다는데...’ 등 박근혜의 생뚱맞음과 매우 닮았다. 굶어 죽어가고 물에 빠져 죽어가는 국민을 조롱한 어이없는 언사임에도 그들은 끝내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했다.

 

앙투아네트는 베르사유 궁전 안에 거울로 가득한 거울의 방을 꾸며놓고 혼자서 연기를 하고 대사를 읊으며 놀았다. 매일 몇 시간씩 화장에 몰두하고 머리를 치장했다. 올림머리도 부족해 60센티가 넘는 가발을 머리에 얹었다. 박근혜 역시 청와대에 기거하는 동안 혼자서 드라마를 보고 밥 먹고 미용주사를 맞아가며 잘도 놀았다. 그들은 누구에게 잘 보이려했던 걸까. 누군가에 대한 사랑이 있기라도 했을까. 그들의 운명에 관한 평행이론은 말하지 않겠다. 아무튼 그들은 사랑 때문에 죽지는 않으리라.

 

우리 역시 슬픔이 웃음이 되어 터져 나올 때까지 하루하루 무심하게 세월은 흘러결국 평범한 병에 걸려 죽을 것이다. 다만 감기에 걸려 죽었다 그러면 창피할지 몰라 폐렴에 걸려 사망했다고 할 것이다. 그들 사진첩의 마지막에는 코에 안경을 걸치고, 장미 꽃다발을 든 평범한 이웃 남자가 등장하게 마련이라는데, 정말 그 비슷한 재미없는 남자가 출현했다. 지금도 내가 아는 한 보수인사는 황교안을 대통령 감으로 생각하기는커녕 정치판에 왜 출현했는지 자체를 의아해한다. 호모 루덴스들은 재미도 감동도 없는 정치인을 환영하지 않는다.

 

장외를 즐기려한다면 명분은 둘째 치고 적어도 영혼을 울리는 감동적인 대중연설 한 줄은 지참해야한다. 그에게 시대정신이 있나, 대통령이 되어야할 당위적 운명 같은 게 있나. 권력을 탐할 관상은 아니라고 봤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권력욕구로 정점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은 승부수를 던질 지점을 본능적으로 간파한다고 한다. 기껏 뜬금없는 단식으로 뜻밖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자찬하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 “솔직히 난 대통령될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다. 이번 총선 출마도 하지 않겠다. 다만 위기에 빠진 당을 구하기 위해 부족한 힘이나마 최선을 다하겠다.”

 

만약에 그렇게라도 한다면 희망의 발꿈치라도 볼 수 있겠건만 연목구어이지 싶다. 그도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슬픔이 웃음이 되어 터져 나올 때까지 하루하루 무심하게 세월을 흘러 보내다가 결국 감기에 걸려 죽고 말 것이다.

 

   --권순진(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