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

막스 피카르트의「침묵의 세계(최승자 역)」에서 - 공산

공산(空山) 2020. 10. 29. 17:22

24쪽(침묵이라는 원초적 현상)

(...)/침묵은 어떤 태고의 것처럼 현대 세계의 소음 속으로 뛰어나와 있다. 죽은 것으로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태고의 짐승처럼 침묵은 거기 누워 있다. 그 침묵의 넓은 등이 아직 보이기는 하지만, 그 태고의 짐승의 몸 전체가 오늘날의 전반적인 소음의 덤불 속에서 점점 더 깊이 가라앉고 있다. 그 태고의 짐승은 점차적으로 자신의 침묵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오늘날의 모든 소음은 다만 그 태고의 짐승, 즉 침묵의 드넓은 등에 붙은 벌레들의 울음소리에 불과한 것 같다.

 

29쪽(말의 침묵으로부터의 발생)

(...)/침묵의 자연 세계보다 더 큰 자연 세계는 없다. 그리고 그 침묵의 자연 세계로부터 형성되는 언어의 정신 세계보다 더 큰 정신 세계는 없다./ 침묵은 하나의 세계로서 존재하고, 침묵의 세계성에 말은 자기 자신을 하나의 세계로 형성하는 법을 배운다. 침묵의 세계와 말의 세계는 서로 마주해 있다. 따라서 말은 침묵과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적대관계 속에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말은 다만 침묵의 다른 한 면일 뿐이다. 인간은 말을 통해서 침묵의 소리를 듣게 된다. 진정한 말은 침묵의 반향(反響)인 것이다. 

 

31쪽

침묵은 말이 없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말은 침묵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말에게 침묵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말은 아무런 깊이도 가지지 못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침묵이 언어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만을 위한 침묵, 즉 말없는 침묵의 세계란 다만 창조 이전의 것일 뿐이다. 그것은 완성되지 않은 창조일 뿐만 아니라 위협적인 창조이다. 말이 침묵에서 발생한다는 것, 그것에 의해서 비로소 침묵은 창조 이전에서 창조로, 무역사성에서 인간 역사로, 인간 가까이로 나오게 된다. 그리하여 침묵은 인간의 일부, 말의 합법적 일부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진리는 오직 말을 통해서만 형태를 지니게 되는 까닭에 말은 침묵 이상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말을 통해서 비로소 인간이 된다. "고대 그리스인이 인간의 본질을 '살아 있는 로고스'라고 정의한 것은 우연일까? 인간에 대한 그러한 정의를 후세에 이성적 동물, 이성을 가지고 있는 생물이라는 의미에서 해석한 것은 물론 틀리지는 않지만, 그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그러한 정의가 나오게 된 현상학적 기반을 감추고 있다. 인간은 말하는 존재로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하이데거)/ 침묵으로부터 말이 나온다는 것, 그것에 의해서 침묵은 비로소 완성된다. 침묵은 말을 통해서 비로소 그 의미와 진정한 가치를 얻게 된다. 말을 통해서 침묵은 야성적인 인간 이전의 것에서 길들여진 인간적인 것이 된다.

 

37쪽(침묵, 말 그리고 진리)

"진리란 없다"고 한 사람이 말했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 자신이 감히 진리란 없다는 것을 하나의 진리로 주장하고 있다."/ 이 한 문장 속에 나타나는 논리적인 힘은 원래부터 언어 속에 들어 있는 논리에 의하여 진실은 언어 속에서 저절로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 주는 한 증거이다. 자신의 구조를 통해서 언어는 인간에게 진실을 가져다 준다. 인간이 진실을 찾기 전에, 진실은 언어 구조를 통해서 인간에게로 밀려든다./ 이것 또한 인간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언어를 획득한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인 어떤 한 존재에 의해서 언어가 인간에게 주어진 것임을 보여 주는 한 증거이다.

 

44쪽(말 속의 침묵)

인간은 자신이 나왔던 침묵의 세계와 자신이 들어갈 또 하나의 침묵의 세계--죽음의 세계--사이에서 살고 있다. 인간의 언어 또한 이 두 침묵의 세계 사이에서 살고 있고, 이 두 세계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 그 때문에 말은 이중의 반향을 가지고 있다. 말이 나왔던 곳으로부터의 반향과 죽음이 있는 그곳으로부터의 반향을.

 

오늘날 말은 그 침묵의 두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말은 소음에서 생겨나서 소음 속에서 사라진다. 오늘날 침묵은 더 이상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가 아니다. 침묵은 다만 아직 소음이 뚫고 들어가지 않은 곳일 뿐이다. 그것은 소음의 중지일 뿐이다. 소음장치가 어느 한순간 작동을 멈추면 그것이 오늘날의 침묵이다. 즉 작동하지 않은 소음이 침묵이다. 이제는 더 이상 여기에 말이 있고 저기에 침묵이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다만 여기에 말해지는 말이 있고 저기에 아직 말해지지 않은 말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아직 말해지지 않은 말이라는 것도 지금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아직 말해지지 않은 말들은 마치 사용되지 않은 연장들처럼 주위에 서 있다. 위협적으로 혹은 권태롭게./ 언어 속에는 또 하나의 침묵, 죽음으로부터 나오는 침묵도 없다. 오늘날에는 진정한 죽음이 없는 까닭이다. 오늘날 죽음은 더 이상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수동적인 어떤 것일 뿐이다. 즉 생명이라고 불리는 것의 중지, 그 최후의 끝일 뿐이다. 다 비워버린 생명--그것이 오늘날의 죽음이다. 죽음 자체가 그렇게 죽음을 당했다.

 

51쪽(침묵과 말 사이의 인간)

침묵은 인간의 마음속에 비애를 불러일으킨다. 침묵은 인간에게 말에 의한 죄로의 전락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상태를 회상시키기 때문이다. 침묵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타락(아담과 이브의 타락/역주) 이전의 상태를 그리워하게 만든다. 동시에 침묵은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침묵 속에 있을 때에는 어느 순간에든 다시 말이 나타나서 그와 함께 죄 속으로의 그 최초의 전락이 또다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시인은 대담무쌍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시인은 말을 다루는 사람인데도 인간이 말로 인해서 죄에 빠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인간은 시인에게 마음이 끌린다. 시인의 언어는 아직도 원초적이기 때문이다. 요컨데 시인의 말은 인간에게는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인간이 되었던 그 최초의 말처럼 보이고, 그것이 인간에게 기쁨을 준다.

 

57쪽(침묵 속의 마성魔性과 말)

일찍이 침묵이 모든 것을 장악했고, 지구는 침묵의 소유였다. 지구는 마치 침묵 위에 얹혀 있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지구는 침묵의 가장자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말이 생기자 악마적인 침묵은 붕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으로부터 지구를 한조각 한조각 떼어내어야 할 것처럼 보였다. 마치 원시림을 한조각 한조각 벌채해서 개간하듯이, 말 속에 깃들어 있는 정신을 통해서 이 침묵의 원시림으로부터 말을 받쳐주고 키워주는 침묵의 우호적 토양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흔히 밤에는 침묵의 본성이 다시 강대해진다. 그러면 마치 말에 대한 습격이 준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두은 숲은 말을 습격하기 위해서 침묵이 모이는 장소처럼 보이고, 집집의 밝은 벽들은 말의 보석처럼 보인다. 그때 어느 집 이 층 방에 불빛이 나타나고, 그러면 이제 말이 생전 처음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침묵의 거대한 상(像)은 자신의 주인--말--을 기다리는 고분고분한 짐승처럼 거기 누워 있다.(...)

 

58쪽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의 시 속에는 침묵하는 밤에 대한 위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달이 뜨고

   밝고 맑게 황금빛

   작은 별들이 하늘에 찬란하다.

   숲은 캄캄한 채 침묵하고 있다.

   그리고 초원에서 놀랍게도

   흰 안개가 솟아오른다.

 

이 시 속에서 밤의 마성적인 침묵은 말의 밝음에 의해서 극복된다. 달과 별, 숲, 초원과 안개는 말의 밝은 빛 속에서 서로를 발견한다. 말의 빛 속에서 밤은 휘영청 밝아져 달, 별, 숲 초원, 안개는 낮--그 낮의 빛으로부터 말이 내려왔다--으로 가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침묵은 이제 더 이상 어둡지 않다. 침묵은 침묵 위에 내리는 말의 광휘에 의해서 투명해진다. 말을 통해서 침묵은 악마적인 고립 속에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침묵은 말의 우애 좋은 자매가 된다.

 

68쪽(고대의 언어)

다양한 방언들이 단 하나의 표준어로 용해된다면, 그리하여 그 표준어가 지나치게 넓게 뻗어나간다면, 그것은 아마도 언어의 본질에 어긋나는 것이리라.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의 경우, 어떤 한 현상의 양과 질 사이에는 특정한 관계가 있다. 인간적 현상은 일정한 양 이상으로 팽창되면 스스로 파괴되지 않을 수 없다. 아마 언어 역시 그러할 것이다. "영어의 진정한 장점은 그 지나치게 일방적인 확장으로 인해서 손상당했다. 새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확실히 참새들에게 많은 장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겠지만, 참새의 번식력을 생각하면 펄쩍 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까다로운 새의 종(種)들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온통 참새들의 왕국만이 남아 있는 세계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릴 것이기 때문이다."(바질드 셀랭쿠르) 

 

73쪽(자아와 침묵)

침묵의 힘이 미치는 곳에서의 개개인은 자신과 공동체 간의 어떠한 대립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인과 공동체는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둘 다 똑같이 침묵을 마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과 공동체 간의 차이는 침묵의 힘 앞에서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한다./ 오늘날 개인은 침묵과 마주해 있지도 않고 공동체와 마주해 있지도 않으며, 다만 보편적인 소음과 마주해 있다. 개인은 그 소음, 그 보편적인 소음도 이제는 소유하지 못하고 침묵도 아직은 소유하지 못한 자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소음으로부터도 고립되고 침묵으로부터도 고립되어 있다. 그는 버림받은 자인 것이다./(...)

 

75쪽

자신의 내부에 침묵하는 실체가 아직 존재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내부를 살펴야 할 필요가 없다. 그에게는 모든 것을 의지의 도움으로 정돈할 필요가 없다. 서로 대립되는 것을 가라앉히는 침묵하는 실체의 힘에 의해서 많은 것들이 저절로 정돈된다. 그러한 인간은 서로 맞지 않는 여러 가지 특성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떤 위기에 이르지 않을 수 있다. 침묵하는 실체 속에는 서로 대립되는 것들을 위한 충분한 공간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때의 삶은 신앙과 지식, 원리와 미, 생명과 정신으로 따로 분열되지 않는다. 단순한 양극적(兩極的) 개념들이 아니라 온전한 실체가 인간 앞에 놓이게 된다. 인간의 현존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날카로운 양자택일 속에서가 아니라 그 중재 속에서 움직인다. 침묵하는 실체가 서로 대립되는 것들 중간에 존재하면서, 그것들이 서로에게 공격적이지 않도록 작용한다. 한쪽이 다른 한쪽에 닿으려면 그 드넓고 유화적인 침묵의 평면을 넘어가야만 한다. 그렇게 서로 대립되는 것들 사이에서 침묵하는 실체가 중재를 한다./ 그럴 때에만이 인간은 자기 자신의 모순을 초월하게 되며, 유머를 가지게 된다. 침묵 앞에서 모순은 아무런 힘도 없으며, 아무것도 특별한 것이 없다. 그것은 침묵에 의해서 삼켜져버린다. 유머를 위해서는 "끝없는 쾌활함이 필요하며, 자기 자신의 모순을 완전히 초월하여 그 모순 속에서 괴롭고 불행해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필요하다."(헤겔) 침묵하는 실체가 없다면, 그 모순은 논란에 맡겨지고 그리하여 동요가 생긴다. "행복과 안락은 사라지고 유머는 끝난다./ 침묵하는 실체가 아직 자기 내부에 존재하고 있을 때 인간은 자기 본성에 반대되는 것, 자신을 소진시키는 것을 더 잘 견딜 수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아직 침묵하는 실체가 가득 차 있는 동양 민족들이 침묵하는 실체가 거의 완전히 파괴된 서양 민족들보다 기계와의 생활을 더 잘 견디는 것이다. 기계와의 생활, 기술 자체는 해롭지 않다. 그것은 다만 인간을 보호해 주는 침묵하는 실체가 없을 때 해로워진다.

 

107쪽(사랑과 침묵)

사랑 속에는 말보다는 오히려 침묵이 더 많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바다 속에서 나왔다. 그 바다는 침묵이다. 아프로디테는 또한 달의 여신이기도 하다. 달은 그 금실의 그물을 지상으로 내려뜨려 밤의 침묵을 잡아올린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은 침묵을 증가시킨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 가운데에서는 침묵이 커져 간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은 다만 침묵이 귀에 들릴 수 있도록 이바지할 뿐이다. 말함으로써 침묵을 증가시키는 것, 그것은 오직 사랑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른 현상들은 모두가 침묵으로 먹고살며 침묵으로부터 무언가를 얻는다. 그런데 사랑만은 침묵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이다./ 연인들은 두 사람의 공모자, 침묵의 공모자들이다. 사랑하는 남자가 연인에게 말할 때 그 연인은 그의 말보다는 침묵에 귀 기울인다. 그 연인은 "침묵하세요"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침묵해요, 내가 당신 말을 들을 수 있도록!"이라고.

 

114쪽(인간의 얼굴과 침묵)

인간이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인간은 하나의 형상, 상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따라서 자신의 형상과 동일할 것이다. 마치 짐승이 겉으로 보이는 모양 그대로이듯이. 짐승의 외양이 짐승의 본질이며, 짐승의 형상이 짐승의 말이다. 인간이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인간과 지상의 모든 피조물은 다만 형상, 상징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면 지상은 기념비로 가득 차버릴 것이고 신이 스스로 세운 창조의 기념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말을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인간은 형상과 기념비 이상의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형상의 지배자이며, 인간은 자신의 본질로부터 형상으로, 현상으로, 형태로 나타나는 것들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말을 통해서 결정한다. 인간은 말을 통해서 자유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형상을 초월하며 자신의 외양을 초월하여 자기 자신을 고양시킬 수 있고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의 형상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일 수도 있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인간은 자신의 얼굴의 형상을 초월하여 자기 자신을 고양시킬 것인가를 말을 통해서 결정할 수 있다. "외양을 보고 모든 인간의 성격을 알아낼 수 있다고 잘난 체하던 조피루스가 우연히 소크라테스를 보게 된 뒤에 소크라테스의 많은 악덕들을 지적하자 모든 사람들은 조피루스를 비웃었다. 그 많은 악덕들 중 어느 한 가지도 소크라테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자신만은 비웃지 않았다. 그는 조피루스의 말이 옳다고 했다. 즉 자신은 그 악덕들을 지니고 세상에 나온 것이 틀림없지만, 이성의 도움으로 그 악덕들로부터 벗어났다고 말했다."(키케로) 인간 얼굴의 진가를 성립시키는 것은 인간이 얼굴의 형상이 침묵하면서 표현하는 것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자신의 얼굴에서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결정을 통해서 인간은 단순히 자연적인 흐름에서 끌어올려지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새로 창조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외양에, 형태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말이 외양의 심판자이며 지배자이다.

 

120쪽

자연, 즉 풍경은 인간의 형태, 인간의 얼굴에 작용한다. 그러나 풍경의 침묵하는 힘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인간 얼굴의 침묵이 필요하다. 오직 침묵이라는 매체를 통해서만이 풍경은 인간 얼굴의 형태를 만들 수 있다. 풍경이 가진 힘들은 크고 넓다. 따라서 그 힘들이 인간의 얼굴 속으로 파고들어서 인간의 얼굴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넓은 길, 침묵이라는 넓은 길이 필요하다./ 침묵하는 풍경, 그것은 인간의 얼굴 속에 들어오면 말하는 침묵이 된다./ 산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산의 모습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그들의 얼굴 속의 뼈들은 솟아오른 암석이다. 그들의 얼굴에는 고갯길, 숨겨진 곳, 산봉우리들이 있다. 그리고 두 뺨 위의 두 눈의 밝은 빛은 어두운 첩첩산중 위에 드리워진 하늘의 밝은 빛과 같다./ 그와 마찬가지로 바다의 특징 또한 인간의 얼굴 속에 뚜렷이 나타난다.(...)/ "오늘날 인간의 얼굴에는 어떠한 바다도 어떠한 산도 없다. 얼굴이 더 이상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에게서 밀어내버린다. 얼굴에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을 위한 자리가 없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뽀족한 극단에 놓이게 되고, 외부 세계는 그 뾰족한 극단에서 떠밀리고 흔들려서 떨어질 것처럼 보인다. 얼굴에서 나무들이 베어지고, 산은 파여 없어지고, 바다는 말라붙었다. 그리고 그러한 텅 빈 얼굴 속에 거대한 도시가 세워졌다."(피카르트, 「인간의 얼굴」

 

124쪽(동물과 침묵)

인간의 본질은 인간의 형상보다는 인간의 말 속에서 더 잘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말하라! 내가 그대를 볼 수 있도록!"/ 반대로 동물은 자신의 본질을 철저히 자신의 형상으로 드러낸다. 동물은 겉으로 보이는 그대로이며, 그럴 수밖에 없다.(...)/ 이것이 동물의 완벽함이다. 인간과는 달리 동물에게는 불일치가 전혀 없다. 그 존재와 형상, 내면과 외면이 하나이다. 이러한 융합이 동물의 순진무구함을 형성한다./ "인간의 외면(인간의 형상)이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것은 실은 그 내부를 위해서 비상하게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괴테) 많은 동물들의 매우 다채로운 외면은 우리에게는 강렬한 색채로 침묵을 부수어 열고자 하는 시도인 것처럼 보인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을 생겨나게 할 수 없는 침묵이 아주 강렬한 색채로 변화된 것이다./(...)/ 그러나 동물들이 인간 가까이에 있듯이 그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무거운 침묵도 그 동물들과 함께 인간 가까이에 있다./(...) 동물은 인간을 위해서 침묵을 지고 다녔다. 물건이라는 짐뿐만 아니라 침묵이라는 짐을 등에 지고 다녔던 것이다. 동물은 침묵을 끌고 인간과 말의 세계를 횡단하면서 인간 앞에 언제나 침묵을 가져다주는 피조물이다. 인간의 말이 헤적거려놓은 것들이 동물의 침묵에 의해서 다시 평온해진다. 동물들은 말의 세계를 뚫고 나아가는 하나의 침묵의 카라반이다./ 동물들은 침묵의 형상들이다. 짐승 형상의 침묵인 것이다. 하늘의 별 형상들(Stembild: 성좌라는 뜻/역주)이 하늘의 침묵을 읊듯이 지상의 짐승 형상들은 지상의 침묵을 읊는다.

 

128쪽(시간과 침묵)

(...)/ 봄은 겨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봄은 침묵으로부터 온다. 또한 그 침묵으로부터 겨울이 그리고 여름과 가을이 온다./ 봄의 어느 아침, 꽃들을 가득 달고 벚나무가 서 있다. 하얀 꽃들은 그 가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침묵의 세계에서 떨어져나온 것 같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그 꽃들은 침묵을 따라서 미끄러져 내려왔고, 그래서 하얀 빛이 되었다. 새들이 그 나무에서 노래했다. 마치 침묵이 그 마지막 남은 소리들을 흔들어 떨쳐버리기라도 한 듯이 그 침묵의 음(音)들을 쪼아올리는 것이 새들의 노래인 것 같았다./ (...)/ 봄의 사물들은 몹시도 연해서 큰 소리를 내며 시간의 단단한 벽을 부수고 나올 필요가 없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봄의 사물들은 시간의 갈라진 틈으로 스며나와 돌연히 거기에 나타났다./ 광장의 아이들이 가장 먼저 그 시간의 틈으로 빠져나온다. 공중에는 공, 땅바닥에는 유리 구슬들과 함께 꽃보다도 아이들이 먼저 나타났다./(...) 마치 뒤따라오는 봄의 사물들에게 길을 가르쳐주려는 듯이.

 

142쪽(농부와 침묵)

농부들의 움직임은 아주 느려서, 마치 느리게 도는 별들이 그와 함께 움직이는 듯하고, 농부의 궤도와 별의 궤도가 서로 겹치는 것 같다./ 농부의 손으로 파헤쳐진 땅에 가득 떨어지는 씨앗들은 하늘의 은하수에 가득한 별들 같고, 그 씨앗들도 은하수의 별들처럼 어렴풋하게 빛을 발한다./ 농부의 생활은 인간 하늘의 궁륭에 붙어 있는 성좌와도 같다.(...)

 

저녁 무렵, 둘 다 어떤 긴 침묵 속에서 집 앞에 앉아 있는 농부 부부. 그때 남편의 아니면 부인의 입에서 한 마디 말이 침묵 속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침묵의 중단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침묵이 거기 있는지 시험해보려고 말이 노크를 해본 것일 뿐, 말은 다시 멀어져간다. 혹은 그것은 침묵만이 온전히 존재할 수 있도록 스스로 인간에게서 빠져나온 마지막 말, 이미 빠져나와 사라져버린 다른 말들을 좇아 달려가는 마지막 말 같으며, 말보다는 침묵의 소유인 낙오병 같다. 이러한 농부의 침묵은 결코 말의 상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이러한 상태의 침묵 속에서 인간은 침묵으로부터 말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태초의 상태에 있게 된다.(...)/ 대지의 평야 위에 솟아 있는 인간, 그것은 침묵의 평야에 튀어나와 있는 말 같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오직 농부만이 아직도 그러한 침묵의 평야를 내부에 가지고 있다. 따라서 들판 위에 솟아 있는 농부, 그는 인간의 말이 생겨나오는 침묵의 평야에 해당되는 것이다.

 

149쪽(침묵 속의 인간과 사물)

오늘날의 대도시는 그와 반대이다. 마치 침묵이 돌연히 도시로부터 파열되어 나온 것 같고, 침묵이 파열될 때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은 것 같다. 도시는 침묵이 파열될 때 파괴되어 마치 침묵이 남긴 잔해처럼, 침묵의 찌꺼기처럼 놓여 있다./ 그러한 도시에서 인간의 언어는 더 이상 인간 자신에게 속해 있지 않으며, 그 도시의 전체 소음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하여 말들은 이제 인간의 입에 의해서 형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그 도시의 기계장치에서 나오는 잇따른 끽끽거림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연의 정적"과 침묵을 얻기 위해서는 전원(田園)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거기에서도 침묵과 만나지 못한다. 반대로 인간은 거대한 도시의 그리고 자기 자신의 내부의 소음을 시골로 가지고 갈 뿐이다. 그것이 "전원으로 돌아가라"는 운동의 위험이다. 적어도 대도시에서는 최소한 말하자면 한 감옥 안에 함께 감금되어 있던 소음들이 시골로 풀려나가게 되는 것이다. 대도시를 분산시킨다는 것, 그것은 소음을 분산시키는 것이며 소음을 도처에 분배하는 것이다.

 

165쪽(시와 침묵(1))

시는 침묵으로부터 나오며, 또한 침묵을 동경한다. 침묵은 인간 자신과 마찬가지로 한 침묵에서 다른 침묵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시는 침묵 위를 비상하고, 선회하는 것과 같다./ 어느 집 마룻바닥이 모자이크로 아로새겨져 있듯이 침묵의 바닥은 시로 아로새겨져 있다. 위대한 시란 침묵 속에 박아넣은 모자이크이다./ 이것은 시에서 침묵이 말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가장 고귀하고 뛰어난 것이라고 해서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시인이 그의 작품에서 드러내는 것보다 더 큰 깊이를 그의 내부에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작품들이 그 예술가의 최선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내부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뿐인 어떤 것, 그것이 시인 자신은 아니다."(헤겔)

 

위대한 시인은 자신의 말들로 대상을 완전히 사로잡지 않는다. 위대한 시인은 그 대상에게 다른 시인, 보다 고귀한 시인이 그 대상에 대해서 한마디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는다. 위대한 시인은 다른 시인도 또한 그 대상을 함께 나누도록 허용한다. 물론 그는 언어로 그 대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만, 그것을 전적으로 혼자 차지하지는 않는다. 그 때문에 그러한 시는 고정되지도 경직되어 있지도 않고 어느 순간에든 다른 사람, 보다 고귀한 사람의 소유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 예를 들면, 괴테가 어떤 대상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이미지는 대상을 질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대상을 가볍게, 투명하게까지 만들어준다./ 에른스트 윙거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한 이미지로 대상을 완전히 사로잡아 그 대상을 감금시킨다. 대상을 덮어버릴 뿐만 아니라 질식시키는 이미지로 그는 대상을 무방비 상태로 만든다. 그는 대상을 무슨 약탈품처럼 가로챈다. 그러한 시에는 자유가 전혀 없다.

 

199쪽(잡음어)

오늘날 말은 더 이상 침묵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말로부터, 다른 어떤 말의 잡음으로부터 나온다고 우리는 말했다. 그와는 달리 침묵으로부터 나오는 말은 침묵으로부터 말 속으로 나아가고, 다시 침묵 속으로 되돌아가서 침묵으로부터 새로운 말로, 거기서 다시 침묵 속으로 되돌아간다. 그렇게 계속됨으로써 말은 언제나 침묵의 중심으로부터 나온다. 문장의 흐름은 언제나 침묵에 의해서 가로막힌다. 언제나 수직의 침묵이 문장의 수평적 흐름을 향해서 튀어나와 그 흐름을 가로막는다./ 그와는 반대로 잡음어는 가로막힘 없이 수평으로 나아간다. 잡음어에게는 무엇인가를 의미한다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증대시켜간다는 것만이 중요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 이 잡음어들은 인간이 말한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죽은 말들의 세계로부터 나온 말의 망령들, 그것들끼리 서로 주고받은, 죽음 말이 죽은 말에게 이야기하는 말의 망령들로서, 죽은 말 두셋이 모여 논리적인 문장을 구성하게 되면 즐거워한다. 마치 망령들이 은밀한 곳에서 서로 만나게 되면 즐거워하듯이./ "생명의 파괴는 생명이 생명의 적으로 바뀌는 데에 있다. 생명은 불멸이고, 따라서 죽음을 당하면 그것은 무시무시한 망령으로 나타난다."(헤겔)/ 말의 파괴란 이러한 것이다. 즉 말이 말의 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치하고 있는 적이 아니라, 우리에게 스며들고 파고드는 적, 그것도 망령으로서, 즉 잡음어로서 파고드는 적이다.(...)

 

잡음어는 침묵도 아니며 소음도 아니다. 잡음어는 침묵과 소음에 똑같이 스며들고, 그리하여 인간은 침묵과 말을 잊어버리게 된다./ 단일한 잡음어가 말하는 사람과 말하지 않는 사람에게 똑같이 파고들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하는 사람과 침묵하는 사람 사이에는 구별이 없다. 침묵하는 사람이란 단지 말하지 않는 사람일 뿐이다./ 잡음어는 사이비 말이며 동시에 사이비 침묵이다.(...) 잡음어가 일단 더 계속되지 않으면, 침묵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잡음어가 한층 더 큰 위력으로 뻗어나가기 위해서 정지하여 고여 있는 하나의 휴지(休止)가 나타날 뿐이다./ 잡음어는 자신이 소멸되리라는 불안을 가지고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오직 그 때문에 끊임없이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잡음어는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잡음어는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믿지 못한다./ 그와 반대로 말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불안해하지 않는다. 아무런 소리가 없을 때, 말은 침묵 속에서 비로소 올바르게 감지된다.

 

(...)1848년의 사건들은 각기 자기 특유의 성격을 가졌고, 또한 바로 그 사건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작용을 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한 사건이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특정한 행위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사건은 전적으로 특정한 한 사건으로서 실제로 존재했다. 그 사건이 중요했을 뿐, 그 사건을 둘러싼 흥분이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 사건의 존재를 알렸던 매체 자체가 그 사건에 의해서 처음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거꾸로 되었다. 먼저 매체가 존재한다. 말하자면 잡음어가 먼저 존재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잡음어이며 그 잡음어가 사건들을 길러낸다. 말하자면 잡음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즉 잡음어에 의해서 그 어떤 것을 사건처럼 보이는 그 어떤 것으로 만들어낸다. 그 사건은 결코 특정한 현상이 아닌, 잡음어의 응고물에 불과할 뿐이다. 모든 사건이 그러한 응고물이며 그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한 사건은 다른 한 사건과 똑같다. 또한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 사건들에 관심이 없다. 그 사건들이 지겨워져서 오늘날 사람들은 정치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또한 사건들은 쉽사리 잊혀진다. 사건들은 잡음어 속에서 떠올랐다가 도로 잡음어 속으로 사라지므로 결코 인간이 스스로 잊어버릴 필요가 없다. 잡음어가 인간을 대신해서 잊어주기 때문이다.

 

240쪽(라디오)

(...)외로운 산골 마을의 농부에게는 산의 고독이 구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 농부는 산의 고독을 표현한다. 그는 자연의 고독을 처음으로 자신의 인격 속에 구체화시키고, 그리하여 산의 고독은 비로소 전적으로 인간의 것이 된다. 이 구체성, 그 농부 속에 깃든 산의 모습이 라디오에 의해서 파괴된다. 라디오는 농부를, 다만 막연하기 때문에 외관상 보편적으로 보일 뿐인, 평준화된 추상 개념의 일부로 만든다. 실제로 그것은 막연하고 해체된 것일 뿐,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이 말에게 말하게 하고서 그것을 말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길들인다. 그것은 곧 인간이 인간에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뜻이며, 인간을 당신으로부터, 당신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것으로부터 당신을 떼어놓는다는, 따라서 사랑으로부터 당신을 떼어놓는다는 뜻이다.(...)

 

라디오는 침묵을 향해서 계속적으로 사격하는 자동 권총처럼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적, 즉 침묵은 그 모든 소음 뒤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 라디오의 잡음은 점점 더 거세진다. 왜냐하면 자신이 침묵에 의해서 그리고 참된 말에 의해서 불시에 기습당할 것이라는 불안이 점점 더 커지기 때문이다./ 때로 라디오의 그 모든 잡음 너머로 침묵의 하늘을 볼 때, 그리고 거기에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거의 하늘의 벽까지도 빨아들이는 빛을 볼 때 인간은 깜짝 놀라고 동시에 기뻐하면서, 다음 순간에는 라디오의 잡음마저도 그 빛에 흡수되어 그 안에서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248쪽(침묵의 잔해)

(...)/ 확실히 하나의 세계로서의 침묵은 파괴되었다. 소음이 모든 것을 차지했고, 이 지상은 소음의 것인 듯이 보인다. 정신이나 종교, 박애, 정치에 의한 세계의 하나됨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음 속에서의 세계의 하나됨이 존재할 뿐이다. 모든 인간과 모든 사물이 소음 속에서 서로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도 소리 없이 아침이 열리고, 나무들이 소리 없이 하늘을 향해서 뻗어나가고, 마치 남모르게 생기는 일처럼 밤이 내리는 그런 일들이 존재한다. 그러한 것들의 침묵이 오늘날보다 더 완벽했던 적도 결코 없었고, 오늘날보다 더 아름다웠던 적도 결코 없었다. 그러한 것들의 침묵은 고독하다. 예전에는 그러한 것들로부터 지상의 다른 사물들에게, 인간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던 침묵의 위력이 이제 완전히 자기 자신 안에서만 작용한다. 그것들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 침묵한다. 어느 가난한 사람이 한번은 다른 가난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나를 존중하지 않아. 그래서 스스로 나 자신을 존중하게 되었지. 나 혼자서만." 그러한 경우들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그것들에게 침묵을 주지 않고, 아무도 그것들에게 침묵을 가져가지 않는다. 그것들은 침묵을 자기 자신에게 주고, 자기 혼자서만 가지고 있다.

 

261쪽(희망)

아마도 침묵은 아직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침묵은 그래도 아직은 인간 속에 있겠지만, 그러나 잠들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때로는 한 사람 혹은 한 민족의 어떤 특성이 다른 특성에 뒤덮여서 오래 전에 죽은 것처럼 보이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한 민족의 시적(詩的) 창조력이 과학적 혹은 정치적 능력에 의해서 지나치게 부추겨짐으로써 오랫동안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시적 창조력이 다시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도 그 충만함으로 그동안의 저 공백기까지 다시 꽉 채워버릴 것처럼 강렬하게 나타난다. 아니 한 시대가 너무나 합리주의적일 때 그 합리주의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될 정도이지만, 갑자기 그 합리주의는 사라져버리고 다시 어떤 합리주의적 시기가 나타난다. 인간 내부의 형이상학적 능력은 파괴되었던 것도 죽었던 것도 아니고, 다만 잠자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때때로 정신의 어느 한 방향이 그것이 본래 원하는 것 이상으로 분명하고 강렬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은 다른 정신이 숨어 휴식하면서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침묵 또한 그럴 것이다. 아마도 침묵은 죽어버린 것이 아니라, 다만 잠자고 있을 뿐이며, 휴식하고 있을 뿐이리라. 그렇다면 소음은 침묵이 잠자고 있는 것을 가려주는 벽에 불과하고, 그렇다면 소음은 침묵을 누른 승리자나 침묵의 주인이 아니라, 자신의 주인, 즉 침묵이 잠자고 있는 동안 소란스럽게 소리를 내며 지키고 있는 시중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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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피카르트(Max Picard, 1888~1965)

독일의 슈바르츠발트 지방에서 태어나 하이델베르크 대학 의학부 조교를 거쳐 뮌헨에서 개업한 의사이다. 만년에는 스위스에서 문필 활동을 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사람의 얼굴(1929)」, 「신으로부터의 도주(1934)」, 「우리 안의 히틀러(1946)」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