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콩밥에 가지 냉국의 저녁을 먹고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횅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한울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위의 글은 백석의 시 「박각시 오는 저녁」의 전문이다. 시인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 지방이 이 시의 지리적 배경이겠지만 나의 어릴적 팔공산 지역의 풍경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시에 나오는 '박각시'는 물론 저녁 어스름에 박꽃이 피기 시작하면 그 박꽃에 날아오는 박각싯과의 나방이다. '주락시'는 날개와 가슴에 줄이 있는 '줄박각시'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는데, 박각시에도 종류가 많다고 한다. 줄박각시, 주홍박각시, 대왕박각시, 꼬리박각시, 녹색박각시, 쥐박각시, 콩박각시, 머루박각시, 탈박각시... 박각시는 자주 보았지만 종류가 이렇게 많은지는 몰랐다. 그리고, 시에 나오는 '돌우래'는 땅강아지를, '팟중이'는 메뚜기의 한 종류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얼마 전에 나는 박꽃 사진을 한번 찍어보고 싶어서 자전거를 타고 저녁 어스름에 이웃 마을을 몇 번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박나물을 좋아하는 내가 팔공산의 텃밭에도 박을 두어 포기 심어서 가꾸고 있지만, 박꽃이 피는 저녁이 오기 전에 아파트로 돌아오곤 하느라 사진을 찍을 겨를이 없었다. 예전엔 초가 지붕마다 박 덩굴이 올려져 있었지만 요즘은 박꽃 구경하기가 힘들어졌다. 운이 좋게도 나는 지묘동의 한 텃밭과 도동마을 안 공터에서 박꽃을 발견하였고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박각시와도 잠깐 마주쳤지만 어둠 속에서 사진은 찍을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카메라의 조리개도 많이 열려야 되지만 셔터 속도도 느려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피사계 심도가 얕아지고 카메라가 흔들려서 선명한 사진을 찍기가 어려워진다. 움직이는 피사체일 때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플래시의 섬광을 터뜨리면 은은한 박꽃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으려고 박꽃 앞에서 카메라에 집중하고 있는데, 아닌 게 아니라 등 뒤에서 붕붕 소리가 들리더니 박각시 한 마리가 나타나 부근의 박꽃에 잠시 접근하는 듯하더니 이내 다른 박꽃 쪽으로 날아갔다. 나비처럼 꽃에 앉는 것이 아니라 꽃 가까이에 잠시 머물다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카메라를 정확히 들이댈 겨를이 없어서 무턱대고 셔터를 눌러 보았지만 재빠른 박각시가 느린 셔터 속도에 찍힐 리는 만무했다.
박꽃에 날아온 박각시를 볼 때까지만 해도 나는 주둥이가 그렇게 긴 줄은 몰랐다. 꿀을 빨아먹으러 왔으면 꽃에 앉아야지 왜 꽃의 주위만 맴돌다가 날아가 버리는지 의아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산가 마당에서 '암끝검은표범나비'를 관찰하다가 뜻밖에 만난 '꼬리박각시'를 보고나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꼬리박각시는 저녁에 박꽃에 날아오는 박각시와는 달리 대낮에 꽃(국화과의 백일홍)을 찾아왔기 때문에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 사진에 찍힌 주둥이는 나비의 그것보다 훨씬 길어서 꽃에 앉지 않고도 공중에서 꿀을 빨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치 긴 호스가 달린 공중급유기나 공중에 정지하여 꿀을 빠는 벌새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가늘고 긴 빨대로 점도가 있는 꿀을 빨자면 얼마나 큰 힘이 필요할지, 그 무거운 몸으로 꽃에는 앉지도 않으면서 휴식은 언제 어디 가서 하는지, 궁금하고 신기했다.
이렇게 해서 오늘은 예전에 미처 못 보았던 박각시의 빨대를 관찰할 수 있었다. 사진이 만족할 만큼 선명히 찍힌 것은 아니어서 다음에 기회가 오면 그 깜찍한 모습을 다시 찍어볼까 한다. 그런데 산가에 갈 때마다 아직 시들지 않은 백일홍과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용담꽃 앞에서 기다려 보지만, 가을이 너무 깊었기 때문인지 꼬리박각시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고 있다. 내년을 기대해 보는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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