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여행길이라

연길, 도문, 백두산, 용정

공산(空山) 2024. 7. 5. 22:16

지난 2일부터 4일까지 2박 3일의 짧은 일정으로 아내와 나는 백두산(북파) 여행을 다녀왔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외국여행은 처음이다. 여러 여행사를 통해 모인 16명의 여행객들은 대구공항에서 티웨이 항공편으로 11시 10분에 출발하여 연길(옌지) 공항에 현지시간으로 12시 30분에 도착하였다. 1시간이 늦어지는 시차를 감안하면 2시간 20분을 비행한 셈이다. 그런데, 연길은 경도상經度上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포항과 비슷한 위치라서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은 거의 같을 텐데 어째서 1시간의 시차가 있는 것일까? 그건 중국이 동서로 긴 국토를 가졌으면서도 동경 120도를 기준한 단일 표준시를 사용하고 우리나라는 동경 135도를 기준한 표준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연길 상공에 이르기 훨씬 전부터 창문덮개를 모두 내려달라는 기내방송이 여러 차례 흘러나왔다. 연길공항이 군사공항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민군民軍 겸용이면서도 사진 촬영이 자유로운 대구공항과 비교가 되었다. 공항 입국장에는 연변 출신의 조선족 가이드가 마중 나와 있었다. 우리는 한족이 운전하는 리무진을 타고 연길 시내에 있는 '렬군속烈軍屬'이라는 식당으로 가서 냉면과 '꿔바로우'(탕수육의 일종)로 점심을 먹었다. 그러고는 바로 두만강 너머로 북한 땅이 보인다는 도문으로 향했다.

중국 땅에서 간판이나 이정표마다 한자와 한글이 함께 쓰여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여기가 조선족 자치주라는 것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검색해 보니 연변 조선족 자치주 내에서 조선족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는 용정시(76%)이고, 화룡시(72%), 도문시(63%), 연길시(49%) 순으로 되어 있다. 이곳 조선족들은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한어漢語와 조선어를 함께 배운다고 한다. 그런데, 근년에 조선족들이 외지로 많이 나가서 살기 때문에 인구가 줄어서 한국의 농촌에서처럼 문을 닫는 학교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장맛비가 내리는 대구공항
연길(옌지)공항 앞

 

연길시내를 흐르는 강 '부르하통하'는 해란강, 가야하와 합류하고 다시 두만강에 합류한다.


도문(투먼)시의 두만강변에 도착했다. 강 건너편은 한반도의 최북단 온성군이다. 강가에는 요즘 보기 어려운 모래톱이 길게 펼쳐져 있었지만 중국쪽 강기슭엔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여기선 함부로 사진을 찍다가 중국 공안에 적발되면 여권과 카메라를 뺏길 수 있다며 가이드가 잔뜩 겁을 주었다. 그렇지만 공안이 있는 곳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사진을 찍으면 공안도 눈감아 준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도문대교가 바라 보이는 곳에서 두만강과 북한의 산을 배경으로 몇 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 다리 중간에 표시된 변계선边界线(국경선)까지 관광객들이 걸어가 볼 수도 있었다는데,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남쪽 나라에선 장미꽃이 져 버린 지 오래되었지만 여기선 아직 한창이었다.

 

도문광장 너머로 보이는 산이 북한땅이다.

 

멀리 보이는 다리가 도문대교이고, 중국쪽 강변에는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다.

 

 

도문시를 벗어나 이도백하를 향하여 고속도로를 달렸다. 끝없이 펼쳐진 완만한 구릉지대는 온통 옥수수밭이었다. 옥수수는 식용과 공업용으로 나뉘는데, 공업용 옥수수를 발효시켜 얻는 알코올은 자동차의 친환경 연료를 만드는 데 쓰인다고 하며, 정부 정책의 뒷받침으로 저렇게 옥수수 재배 면적이 늘었다고 한다. 예전에 학교에 다닐 적에 만주의 특산물이 '조콩밀'이라고 외던 기억이 남아 있지만, 조와 콩과 밀밭은 보이지 않았다.

광활한 땅을 보며 나는 그 옛날 이곳 만주로 와서 논밭을 일구며 터전을 잡았던 조선족들을 생각했다. 굶주리던 시절에 저 넓고 비옥한 황무지를 두고 어찌 일궈 볼 욕심이 나지 않았겠는가. 물론 먹고 살기 위해 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을 위해 왔거나 일제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한반도의 남도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만주를 떠돌아다니다가 병이 든 후에야 단신으로 돌아와 고향에 묻혔다는 작은할아버지를 생각했다. 그 할아버지가 방황하던 곳이 여기쯤 아니었을까?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셔서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당신의 산소를 나는 아버지가 하시던 대로 지금도 해마다 벌초하며 보살피고 있다.
 
 

 

 

 

버스가 용정시를 벗어나 이도백하 마을을 향해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에 들판 너머 멀리 왼쪽으로 보이는 산등성이를 가리키며 가이드는 '일송정'에 대해서 설명했다. 일제가 일송정을 고사시키고 나서 세월이 많이 지난 후에야 한국 각계각층의 후원으로 소나무를 새로 심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나무가 죽어서 몇 번을 다시 심었고, 1991년도에 새로 심은 지금의 소나무는 잘 자라고 있다고 한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줌인zoom in하여 사진을 찍어 보았는데, 일송정 소나무와 그 옆의 정자가 그런대로 선명히 찍혔다.
 
 

산마루에 일송정과 정자가 보인다.
화장실 이용을 위해 정차한 휴게소 마당 귀퉁이에서 몇 년 전 대구수목원에서 보았던 '아놀드레드'를 만날 줄이야. 아놀드레드는 미국에서 개량한 관상식물(인동과)이다.

 
이도백하 마을의 '왕조성지온천주점'에 여장을 풀고 온천욕을 한 후 첫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높은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여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천지 구경은 무난할 것 같았다. 그러나 천지의 날씨는 워낙 변화무쌍하여 천지를 볼 수 있는 날은 1년에 100일 정도뿐이라고 한다. 비가 올 것에 대비하여 비옷을 준비해 왔고, 어제저녁엔 호텔에서 신발 덮개까지 사 두었다. 아침에 호텔을 출발할 때 천지에 올라가는 도중의 멀미에 대비하여 아내는 준비해 온 멀미약도 먹었다.
 
 

호텔의 야외 온천과 식당앞에 진열해 놓은 인삼

 

셔틀버스에서 내려 먼저 장백폭포를 보러 걸어 올라갈 때, 계곡인데도 바람이 세게 불었고, 양쪽의 산 위로 지나가는 구름의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강풍으로 천지에 입산 금지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가이드는 전했다. 우리는 장백폭포 앞까지 계단을 올라가서 구경한 다음 내려와서 천지 대신에 부근의 '소천지'와 '녹연담'을 구경하는 수밖에 없었다. 천지에서 내려오는 장백폭포의 물이 산기슭의 조그만 호수인 소천지로 흘러들고, 소천지의 물은 다시 제주도의 '곶자왈'처럼 울창한 숲에서 좁고 깊은 협곡을 만들며 세차게 흘러 '녹연담' 폭포로 이어지고 있었다. 지도를 보면, 이 물은 흘러서 쑹화장松花江을 이루고 지린吉林과 하얼빈哈尔滨, 자무쓰佳木斯를 거쳐 헤이룽장黑龙江(아무르강)에 합류하며, 러시아의 하바롭스크를 지나 북태평양의 오호츠크해로 흘러 들어간다.
 
 

주차장에서 장백폭포로 올라가는 길

 

온천이 솟고 있었지만 기온이 높아 김은 잘 보이지 않는다.
장백폭포에서 내려오며 바라본 경치. 빙하가 만든 U자 계곡이다.
'미려하호'ㅡ아름다운 강과 호수
자작나무가 있는 소천지

 

물은 숲속에서 좁고 깊은 협곡을 만들며 흐른다.
녹연담 폭포의 높이는 26m, 물빛은 에메랄드 빛이다.

 
장백폭포와 녹연담을 떠나 삼림지대를 1시간 이상 달렸다. 길 양쪽의 원시림에는 북방 수종인 자작나무가 많았다. 그 숲 속에 한번 들어가 보고 사진도 찍고 싶었지만, 우리 일행만 탄 버스가 아니어서 차를 세워 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연길에 도착하여 돌솥밥으로 점심을 먹고 전신마사지를 받았다. 나는 마사지 같은 건 좋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요금이야 미리 여행경비에 포함됐겠지만 5달러의 팁을 받지 못해서 한 사람이 섭섭하게 되면 안 될 테니까. 가냘픈 여인들이 마사지해 주는 데도 아내와 나는 각자의 침대에 누워 '살살'이라는 공용어(?)를 연발해야 했다. 끝난 후에는 가이드가 가르쳐 준 대로 '싱쿨러'(수고했어요)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양꼬치구이 식당으로 가서 옥수수국수를 곁들여 저녁을 먹었는데, 대구에서 먹어 보았던 양꼬치의 맛이나 식당 분위기가 여기서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이곳 식당들의 음식이 대부분 한국식인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한국으로 가서 몇 년씩 돈을 벌며 일을 배운 후에 돌아와 개업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생태룡정'이라는 글씨와 나뭇잎 모양의 네온사인으로 장식한 가로등이 수십 km에 걸쳐 서 있는 용정시의 시가지를 벗어나 '비암산온천고촌락琵岩山溫泉古村落' 호텔에서 둘째 날의 여장을 풀었다.
 
 

천지행 승합차들이 강풍에 발이 묶여 있다(왼쪽 사진).
간판들이 이채롭다. 오른쪽 사진에 보이는 '정일품'이라는 식당에서 양꼬치구이를 먹었다.
비암산온천 호텔 전경과 호텔에서 준 생수들.

 
비암산 호텔에서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산등성이에 구름다리가 놓여 있고, 호텔 앞에는 전통 기와집이 많은 민속촌이 있었다. 비암산이라면 선구자 노랫말에 나오는 그 비암산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산등성이를 훑어보니 아닌 게 아니라 여행 첫째 날 도문에서 이도백하로 가다가 보았던 그 일송정이 산 너머 쪽 반대 방향에서 보이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달리는 차창 속이 아닌 데다 산이 가까워서 사진을 더 선명히 찍을 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비암산 꼭대기에 올라서 해란강이 구불구불 흐르는 들판을 한번 내려다보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작사, 작곡자의 친일 행적 논란에 지금은 인기가 좀 시들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 민족에게 감동을 주는 노래 '선구자'를 나는 흥얼거렸다.


   선구자
   윤해영 시, 조두남 곡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사진 맨 오른쪽의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에 일송정이 있다. 아래 사진은 망원렌즈로 줌인하여 찍은 것.
민속촌에 때 아니게 만발한 꽃은 아무리 보아도 조화인 것이 분명했다.

 
마지막날 아침, 우리는 비암산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리무진을 타고 용정시내로 나갔다. '해란강'을 가로지르는 '용문교'를 건너 조금 가다 보니 왼쪽 숲 속에 '용두레 우물'이 보였다. '룡정 지명 기원지 우물'이라고 쓴 비석도 보였다. 그러나 리모델링 공사 중이라 가림막이 설치돼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갔기 때문에 우리는 차창으로만 구경하며 지나갔다.

용두레 우물이 있는 이 작은 숲을 '거룡우호공원巨龙友好公園'이라고 하는데, 1996년에 한국의 거제시와 용정시가 자매결연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공원이라고 한다.
 
 

해란강
용문교. 출근시간이라 다리 위에 차들이 많이 밀려 있다.
버스 안에서 용두레 우물터를 관람하고 있는 일행. 공원에는 리모델링 공사로 입장할 수 없다.
'룡정 지명 기원지 우물'이라고 쓴 비석과 우물이 보인다.
용정시내의 버스 정류장과 택시
'각 민족이 함께 향유할 수 있는 양호한 환경을 조성하자', '사람마다 모범이 되어 민족단결의 꽃을 피우자'라는 구호들이 걸려 있다.

 

 
용정시와 연길시는 나지막한 언덕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다. 연길시로 넘어가서 소고기 전골 등으로 점심을 먹고 일행은 일정에 따라 규모가 큰 라텍스 매장에 들렀다. 비싼 매트나 이불을 사자니 부담이 되고 안 사자니 눈치 보이고... 애초에 '노옵션 고품격' 여행상품이라고 해서 예약했지만 라텍스 매장 방문은 일정에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중국여행에서 이렇게 떠밀려서 억지로 하는 쇼핑이 없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결국 아내는 고무 함량 94%의 얇은 이불 한 장에 베개 하나를 덤으로 끼워 샀다. 덕분에 일행들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그리고 공항에 가기 전 농산물 판매장에도 들렀는데, 거기선 자발적으로 참깨, 말린 능이, 잣 등을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상품이 싸고 좋으면 사지 말라고 해도 많이 사게 되는 것이다. 공항에서 작별인사를 하면서 젊은 조선족 가이드에게 내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쇼핑을 많이 못 해 드려서 미안하군요" 가이드는 양손으로 내 손을 감싸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서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강풍으로 천지에 올라가지 못한 것과 일정에 없어서 윤동주 시인의 생가를 탐방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훗날에 기회가 있을 것이다. 시인의 생가 앞엔 중국 당국이 '중국조선족 애국시인'이라고 쓴 표지석을 세워 두었다는데, 언제일지 모르지만 이왕이면 그것이 시정된 후에 가게 되면 더 좋을 것이다.

14시에 연길공항을 이륙하게 돼 있던 티웨이 비행기는 그 상공을 지나가야 할 다롄大连 지역의 악천후 때문에 15시 20분에야 이륙하였고, 한국시간으로 18시 40분에 대구공항에 착륙하였다.
 
 

첫째날 냉면을 먹었던 식당에서 마지막날 소고기전골을 먹었다.


※ 그동안 모바일에선 사진 확대가 안 되어서 불편했는데, 이젠 사진을 클릭해서 두 손가락으로 벌리면 확대가 된다. 티스토리 블로그가 많이 개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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