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일기

감자를 캐며

공산(空山) 2023. 6. 29. 21:46

나의 폰에 내장된 캘린더 앱의 3월 19일자엔 ‘감자 및 완두 파종’이라고 메모되어 있다. 완두는 이미 열흘 전에 수확이 끝나 그 자리에 옥수수 2차 파종을 하였다. 물론 그 무렵에 파종했던 옥수수는 지금 내 키보다 훨씬 더 자라 꽃이 한창 피어 있다. 오늘은 장마가 주춤한 틈을 타 감자를 캐었다. 감자는 그다지 길지 않은 이랑에 흰 감자와 붉은 감자를 한 이랑씩 심었었다. 감자를 심을 때 이랑에다 가마솥 아궁이의 재를 퍼다가 듬뿍 뿌려준 데다 봄 가뭄이 심하지 않아서 그런지 알이 제법 굵다. 호미와 손으로 파헤치는 흙 속에서 포기마다 네댓 개씩 감자가 뛰어나온다. 다친 팔이 아직 다 낫지 않아 밤에는 많이 아프다는 아내도 옆에서 거들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내가 어릴 적에는 이 산골에까지 고구마는 아직 들어오지 않아서 재배할 줄 몰랐고, 감자가 벼와 보리에 이은 주된 농산물이었다. 감자를 캐고 난 밭에는 이모작으로 들깨를 모종하거나 무, 배추를 파종했었다. 감자는 주로 삶아서 먹었지만 소죽을 끓인 아궁이의 숯불에 구워서도 많이 먹었다. 야산으로 동네 아이들이 함께 소 먹이러 갈 때는 생감자를 도시락 대신 싸 가곤 했다.
 
소 먹이러 가면, 이까리(고삐)가 소의 발에 밟히거나 나무에 걸리지 않도록 그것을 뿔에 단단히 감아준다. 그러면 소들은 소들끼리 산자락에서 자유로이 풀을 뜯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드넓은 묘터의 풀밭에서 온갖 놀이를 하며 놀다가 배가 고파지면 감자를 삶아 먹는 것이다. 그런데 솥도 냄비도 없는 산에서 감자를 어떻게 익혀 먹었을까? 바로 ‘감자묻이’라는 독특한 방식이 있었다. 땅에다 구덩이를 파고 마른 나뭇가지들을 주워와서 그 구덩이 위에 수북이 걸쳐 얹은 다음 그 위에는 자갈도 주워와 올려놓고 불을 땐다. 구덩이 위에 걸친 나무들이 다 타서 구덩이 속으로 풀썩 내려앉을 즘이면 자갈도 뜨겁게 달구어진 상태가 된다. 그 뜨거운 숯과 자갈의 불구덩이에 생감자를 들이붓고는 칡 이파리를 여러 장 따서 덮고 그 위에 흙을 두텁게 덮는다. 그러고는 그 덮은 흙에 꼬챙이로 구멍을 뚫어 계곡에서 고무신에다 떠온 물을 조금 부어넣고 구멍을 다시 막아 둔다. 한참 기다린 후에 흙을 걷어내면 감자는 향기로운 칡 이파리와 함께 푹 익어 있다. 굽고 찌고 삶는 것이 한 구덩이에서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 감자묻이는 수천 년 전부터 한반도에서 삼베길쌈을 할 때 삼단을 찌던 ‘삼묻이(삼굿)’에서 유래한 방식이다. 그렇지만 길쌈에 대해선 나는 어른들로부터 이야기만 들었을 뿐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렇게 감자를 먹으며 소를 먹이며 소와 함께 아이들은 자랐다. 물론 감자만 그렇게 먹은 것이 아니라 철따라 가재, 버들치, 개구리, 메뚜기, 참새를 잡아 볶아먹고 구워먹었다. 송기와 찔레를 꺾어 먹고 삐삐(삘기)를 뽑아 먹었으며 머루, 다래, 으름, 깨목(개암), 물포구(보리수), 아그배를 따 먹고 칡뿌리도 캐 먹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처럼 모닥불 앞에 앉아 얼굴에 숯검정을 묻혀가며 콩사리와 밀사리*도 해 먹었다. 산토끼와 사촌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지, 한 번은 달짝지근한 맛이 나는 등칡(등나무)의 뿌리를 캐어 나눠 먹었는데, 그날 밤엔 마을에 난리가 났다. 아이들이 모두 구토와 설사를 했기 때문이다. 풀독이 오르거나 벌레에 물린 다리에는 부스럼이 사라질 날이 없었다. 여름에는 소와 다름없이 사타구니에 붙어 있는 몇 마리의 진드기를 떼어 내야 할 때도 있었고, 겨울밤에는 호롱불 앞에 오랑우탄처럼 앉아 내복을 뒤집어 이를 잡았다.

이왕 감자를 캐다가 생각난 것이니 소 먹이던 이야기를 좀더 해보자. 해가 서산에 걸릴 때쯤이면 아이들은 소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집집마다 일소가 한 마리씩은 있고 송아지까지 딸린 집도 있으니 그 작은 외딴 산골 마을에도 소가 여남은 마리는 되었다. 한번은 아이들이 소들을 몰아 마을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비좁은 오솔길 내리막을 우르르 내닫고 있는 소떼를 미처 피하지 못한 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엉겁결에 자기 치마를 뒤집어쓰고 오솔길에 쪼그려 앉았는데, 모든 소들이 허들을 넘듯이 뛰어넘으며 지나가서 그 아이는 결국 멀쩡히 일어났다. 또 어떤 때는 아이들이 풀밭에서 노는 데에만 열중하다가 저녁때가 되어 소들을 찾아보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 계곡 안으로 얼마나 깊이 들어갔는지 소의 목에 달린 요령 소리도 들리지 않아 아이들은 소를 잃어버렸다고 울며 불며 마을로 내려온다. 어른들이 등불을 들고 산 속으로 소를 찾으러 가고, 종일 풀을 뜯어먹어 배가 부른 소들이 한데 모여 자고 있는 것을 깨워 마을로 데려온다.

감자를 캐다보니 또 아일랜드라는 먼 섬나라의 아픈 역사도 생각난다. 이웃나라인 영국으로부터 오랫동안 식민지로서 지배를 받으면서 아일랜드 사람들은 대부분의 식량과 가축들을 수탈 당하며 살았다. 농토마저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근근이 살아온 민초들은 그나마 남미로부터 전파된 감자 농사로 식량난을 해소해 나갈 수 있었다. 감자는 수탈 대상이 아니었던 데다 척박하고 습한 땅에서도 잘 자랐으며 단위면적당 소출이 많은 작물이기 때문이었다. 감자 농사의 확산에 힘입어 인구도 늘어났지만, 1845년에 닥친 긴 장마와 고온 현상으로 인하여 감자 잎마름병(역병)이 번졌고 모든 감자들이 썩어갔다. 그 결과 전체 인구가 800만이던 나라에서 100만이 넘는 인구가 굶어 죽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미국 등지로 이민을 떠났으며, 이민을 가는 도중에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리하여 아일랜드가 막상 독립했을 땐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든 나라가 되어 있었다.

갓 캔 감자를 한 바가지 삶아서 뒷집 부부와 함께 먹었다. 아내는 새로 터득한 방법이라며 전기 밥솥에다 감자를 넣고 밥하듯이 삶았다. 감자의 품종도 삶는 방법도 예전과 달라서 포슬포슬하니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럽다. 감자는 뜨거울 때 먹어야 맛이 있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먹으면 맛이 더 좋다. 낡은 탁자 앞에 둘러앉아 차 한 잔과 함께 감자를 먹다 보니 우리가 꼭 빈센트 반 고흐의 걸작인「감자 먹는 사람들」속의 가난한 농부가 된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이렇게 별미로 맛보는 감자이지만, 이 감자가 없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갔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보릿고개를 넘기는 구황작물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감자를 캐고 먹는 감회가 새롭다.
 

빈센트 반 고흐「감자 먹는 사람들」1885년, 캔버스에 유채 (82 × 114cm)

 
 

 * 콩사리, 밀사리 : 누렇게 영글어 가지만 아직은 풋내가 나는 콩이나 밀을 뽑거나 베어서 포기째 모닥불에 그슬려 먹는 일을 가리킨다. 그슬린 콩 꼬투리나 밀 이삭을 손바닥으로 비빈 다음 까끄라기는 입바람으로 불어서 날려 버리고 알갱이를 입에 털어 넣으므로 손바닥뿐만 아니라 얼굴에도 숯검정이 묻는다. 타고 남은 재 속에서 알곡을 줍는 데서 사리舍利라는 말이 붙은 것 같다. 재미있고 아름다운 우리말 사투리이지만, 이젠 말만 남았을 뿐 실제로 콩사리와 밀사리를 해 먹는 모습은 보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