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숲이 지금처럼 무성하지 않았을 적에는 마을이나 논밭 주위, 야산에 산초나무가 많았었다. 소를 먹이러 가거나 나무하러 가면 흔히 볼 수 있었다. 지금도 고향 동산에서 많이 눈에 띄지만 열매를 많이 달고 있는 산초나무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울창해진 큰키나무들의 그늘에 가려서 일조량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산초를 나의 고향에선 '난대'라고 한다. 향이 강하고 독특해서 나는 이 나무를 어릴 적엔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다 이 나무의 잎을 만지게 되면 거기서 나오는 냄새가 싫어서 코를 막곤 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든 후에 언제부터인지 그 냄새가 좋아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일부러 잎을 만지거나 따서 코를 대고 향기를 음미까지 하게 되었다.
몇 년 전부터 나는 묵은 밭에다 그 산초나무를 너댓 그루 키우고 있다. 동산에 자생하고 있는 어린 나무를 캐어다 심은 것이다. 밭에는 그늘을 드리우는 큰키나무들이 없기 때문에 열매가 많이 열리는데, 지난해에는 열매로 기름을 짜니 참기름병으로 두 병 남짓 나왔었다. 그것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수시로 한 숱갈씩 먹었다. 산초기름은 위나 기관지 건강에 도움이 되고 아토피 피부염 등을 개선하며 들기름처럼 오메가3를 함유하고 있어 피를 맑게 한다는 속설이 있다. 그러나 나는 꼭 무슨 약효를 바라서가 아니라 향기가 좋아서 먹는다. 아내는 그 향기를 싫어해서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동네 방앗간에선 압착기에 남는 냄새의 뒷처리 문제 때문에 산초기름을 짜주지 않아서 멀리 대구역전의 번개시장까지 가서 기름을 짰었다.
나는 오늘 텃밭에서 산초를 땄는데, 올해도 작년 정도의 수확량은 될 것 같다. 열매를 말리고 막대기로 두들기고 까불러서 겉껍질을 버리고 나면 남을 까만 열매가 되가웃은 될 것이고, 기름을 짜면 또 두 병은 나올 것이다. 그 고소하고 쌉싸름하면서도 형언할 수 없는 긴 여운의 뒷맛을 생각하면 벌써 입에 침이 고인다.
한편, 산초나무와 생김새가 비슷하면서도 향기는 전혀 다른 초피나무가 있다. 고향에서는 '지피'라고 하는데, 경상도식 추어탕에 없어서는 안 되는 향신료이다. 잎의 모양이나 가지에 난 가시, 열매의 크기가 산초나무와 비슷하지만, 열매를 맺는 위치와 모양에서 큰 차이가 있다. 산초는 가지 끝에만 무더기로 열매를 수십 수백 알씩 달지만 초피는 가지 전체에 걸쳐 몇 알씩 흩어서 열매를 단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차잇점은 산초는 열매의 껍질을 버리고 알갱이만 기름을 짜는 데 쓰지만, 초피는 반대로 알갱이는 버리고 열매의 껍질만 말리고 갈아서 향신료로 쓴다는 것이다. 산초나무, 초피나무, 귤나무, 탱자나무는 다 '운향과'에 속하는 나무들이라고 한다.
초피나무는 고향에서 자생하는 모습을 예전엔 찾아볼 수가 없었지만, 내가 오래전에 청도쪽으로 등산을 간 산에서 받아온 씨앗을 산가 뒤안과 텃밭 주위에 퍼뜨렸다. 나무 아래 씨가 떨어져 자란 묘목을 이웃에게 나눠주기도 해서 지금은 고향마을에서도 초피나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요즘은 산초와 초피의 열매가 익어서 껍질이 벌어지고 알갱이가 드러나는 때인데, 비둘기를 비롯한 온갖 산새들이 찾아오고 있다. 그들은 산초와 초피 모두 겉껍질엔 관심이 없고 까만 씨만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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