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속유 - 도종환

공산(空山) 2022. 8. 15. 17:10

   속유俗儒

   도종환

 

 

   읍내에는 겨울비 내렸으나

   산기슭에는 눈이 온다하여

   물 끓여 약차 달이며 온종일 칩거하였습니다

   선생은 속유俗儒가 되지 말라 하셨습니다

   학문을 하되 선대의 문장에 갇히거나

   서책 안에서만 세상 이치를 구하는 이도

   속된 선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셨지요

   선생의 말씀대로 애절양하는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통곡과 함께 하고

   고락도 함께 하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전란 병화에서 나라를 지키고

   진흙구덩이에 빠진 이들

   숯불에 데인 듯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을 건져내고

   재용財用을 넉넉히 하는 일에 진력하는 것이

   학문을 한 선비가 가야하는 길이라 하셨습니다

   전란에서 나라를 구하는 일은 성과가 있었으나

   백성들은 오늘도 편안하지 않으며

   이용후생利用厚生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역병을 물리치고 수명을 늘리는 일도 진전이 있으나

   스스로 자진하는 이들이 날로 늘어나

   명탁의 악업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지고

   그릇된 견해로 어지러운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속세에 나오지 않고 경서를 읽으며 학문하는 동문들은

   시문을 지으며 자적한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새와 물고기와 꽃의 말을 알아들으려 하고

   바람의 언어에 주석을 다는 일을 하는 그들을

   선생은 속된 선비라 하셨으나

   성정이 남루해지는 건 오히려 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는 일이 힘에 부치며 정신의 균형을 잃고

   벼랑 끝으로 몰릴 때마다 날카로워지며

   경세치용經世致用은 곳곳에서 저항에 직면하곤 하니

   공부가 많이 부족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찬바람 불고 높은 산에 눈발이 날리는 겨울밤

   선생께 긴 편지를 쓰려 합니다

'내가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흰 웃음소리 - 이상국  (0) 2022.08.15
낮잠 - 김이강  (0) 2022.08.15
남해 보리암에서 - 김원각  (0) 2022.08.13
창술 - 박지웅  (0) 2022.08.06
골목 - 진 란  (0) 2022.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