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창술 - 박지웅

공산(空山) 2022. 8. 6. 15:24

   창술

   박지웅

 

 

   뒷산 기슭에서 창잡이와 마주쳤다

   어린놈이 창끝 올려 길 막고 섰는데 서슬 세운 묵직한 본새가 예사롭지 않다

   일순간에 맞선 마음이 뻣뻣이 일었으나 철없는 때겠거니 발길을 물렸다

   장대비 몇 곡에 오뉴월이 훌쩍 지나고 훔쳐보았다

   창술을 연마하는지 훤칠해진 그는 하염없이 한 자루 창을 뽑아드는 중이었다

   들었다. 본디 이들은 창 한 번 다 뽑는데 백 년이 걸린다는 소문을

   느린 창이라지만 모름지기 무딘 끝은 아니어서

   낭창낭창 치긋고 내리긋는 창 춤에 목덜미 저린 듯 새 소리 잦아들고 일찌감치 끊겨나간 구름 한 필 서산에 흩어져 내리었다

   무공이 한결 깊어 보였다

   흰 눈썹을 해마다 일만 근씩 대숲에 쏟아내는 바람과 일합을 겨루었을까

   창공에 쑥 장창을 밀어넣는데 급소 꿰뚫린 듯 바람 속이 서늘하였다

   그것이 아름다워서였는지 바람이 물속같이 맑아져서인지 먹빛 그늘에 숨어 나는 숨이 가빴는데

   창끝에 꽃 하나 얹는데 족히 백 년이 걸리는 왕대의 창술은 그때 가장 눈부시다 했다

 

 

   ―나비가면, 문학동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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