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일기

가 보고 싶었던 길

공산(空山) 2022. 7. 20. 21:06

올 장마는 며칠마다 한 번씩만 비가 내리고 맑은 날이 많아 텃밭 식구들이 건강히 자라고 있다. 지난해와는 달리 참깨는 아직 시들음병이나 역병이 없이 꽃을 잘 피우고 있다. 봄 가뭄 때 진딧물이 많이 끼었었고 우박까지 맞아서 몰골이 형편없었던 토마토와 고추도 지금은 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 땅콩은 땅속으로 씨방자루(자방병)를 한창 내리는 중이라서 며칠 전에 북돋우기를 해 주었고, 옥수수는 먼저 익은 것 몇 자루를 벌써 가꾼 사람에게 내주었다. 어제는 텃밭에 설치되어 있는 동력 분무기의 호스를 산가 마당까지 멀리 뻗쳐 감나무에 살충제와 살균제를 섞은 농약을 쳤다. 잡초를 뽑거나 베고, 산짐승이 들어오지 못하게 울타리를 단속하고, 웃자라지 않도록 순을 따 주고, 말목을 박고 줄을 쳐서 자세를 잡아 주며 웃거름을 뿌려주는──텃밭의 일이라는 것은 끝이 없다. 잠시만 일을 해도 온몸은 땀 범벅이 된다. 그렇지만 아내와 나는 쉬어가면서 일을 한다. 한낮에는 악기(나는 트럼펫, 아내는 오카리나)를 연습하기도 하고, 때로는 낮잠도 잔다. 그리고 요즘은 이틀에 한 번씩만 텃밭에 가서 일을 한다.

 

텃밭에 가는 날이든 가지 않는 날이든 특별한 일이 없는 날엔 나는 매일 새벽에 한 시간 정도 자전거를 탄다. 전에는 저녁노을이 좋은 때에 자전거를 타곤 했는데, 여름에 들어서고부터는 시원하고 신선한 공기가 좋아서 해가 뜨기 전에 자전거를 타고 나간다. 내가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지 1년 6개월이 지났는데, 앱이 가리키는 통계를 보면 그동안 이동한 거리가 5,300km, 시간은 400시간, 누적 상승고도가 6,000m에 이른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더니 매일 조금씩 탄 것이 누적되어 이렇게 거대한 숫자가 되었다.

 

오늘은 텃밭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라서 자전거를 타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곳에 한번 가 볼 작정을 하고 동이 트는 새벽 5시가 조금 넘어 집을 나섰다. 헌 자전거를 버리고 접이식 새 자전거를 며칠 전에 산 아내도 함께 집을 나섰지만, 그는 새로운 길을 선호하는 나와는 달리 아파트 주위의 익숙한 길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아내와 집앞에서 헤어진 후 혼자서 금호강과 불로천변을 거슬러 달리다가 '도동 측백나무숲' 직전에서 오른편의 낯선 길로 접어들었다. 이곳은 집에서 그리 멀지는 않지만 내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다. 아파트나 부근의 산등성이에서 멀리 바라보면 산속에 온통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어 한적해 보이던 곳이었다.  그곳에 접어들고 보니까 동촌비행장과 그 뒷편으로 달리는 경부고속도로에 땅을 거의 다 내주고 남은 자투리 땅이었다.

 

길가엔 민가가 몇 채 서로 떨어져 있었고, 넓지 않은 밭들과 높은 고속도로 사이로 난 좁은 길은 그나마 포장이 되어 있어 자전거 타기에는 좋았다. 도동 측백나무숲과 연결된 도로의 일부 구간은 특이한 공법으로 포장되어 있었는데, 모든 자전거길이 그런 공법으로 포장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탄하면서도 아름다운 노면이었다. 도로에는 시간이 일러 다니는 자동차가 없었지만, 농부 몇몇은 벌써 텃밭에 나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고, 오랜만에 보는 수세미꽃도 샛노랗게 피어 있었다. 길 옆에는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선생의 영정을 후손들이 모셨다는, 대구시 문화재자료인 '문창공 영당(文昌公 影堂)'과 경운재(景雲齋)가 붉은 배롱나무 꽃과 함께 고풍스럽게 자리잡고 있었다. 고속도로 밑으로 난 굴다리를 지나, 어쩌면 동촌비행장 동쪽의 둔산마을까지도 이어질지 모른다는 기대를 하면서 계속 들어갔지만, 결국엔 산자락과 '달맞이 식당'이라는 이름의 건물에 길이 막히고 말았다. 돌아나오다가 다시 고속도로 너머 쪽으로 난 길로 접어들었는데, 그곳은 비행장의 철조망 담장을 따라 길이 나 있었다. 이 길도 기대와는 달리 결국엔 용도를 알 수 없는 육중한 철문 앞에서 끝나 버렸다.

 

아무튼 오늘 아침엔 그동안 생각만 하던 길을 끝까지 가 보게 되어서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렇지만, 비행장과 고속도로라는 거대한 시설에 대부분의 땅을 내어준 뒤에 자투리로 남아 폐쇄되고 막다른 구석이 되어버린 곳, 거기에 동서로 숨을 터 주는 실낱같은 오솔길이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짠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강변길에는 낯익은 백일홍과 달맞이꽃이 한창이었다. 

 

 

 

노면이 평탄하면서도 무늬가 아름답다.

 

문창공 영당

 

경운재

 

수세미꽃

 

나중에 알고 보니 저 철문 너머는 군 사격장이었다.

 

불로천변의 백일홍

 

 

불로천의 부들
불로천변의 '가우라'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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